북쪽길#1 여긴어디 난누구
직장 그만두고 스페인 여행길에 오른 30대 딸, 은퇴 후 인생 후반전을 시작하는 부모님과의 140일간 산티아고 순례 배낭여행을 기록합니다.
2,887km 찐으로 걷는 배낭여행
✅ 프랑스길 Camino Francés (2018)
✅ 피스테라, 무시아 Camino de Fisterra y Muxía (2018)
✅ 은의 길 Vía de la Plata (2022)
✅ 북쪽 길 Camino del Norte (2022)
✅ 영국 길 Camino Inglés (2022)
이래서 북쪽길, 북쪽길 하는 건가. 이룬에서 시작하는 첫날, 산세바스티안까지 가는 길은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 초면부터 얄짤없이 빡세다. 하지만 얼굴값이라 했던가, 비주얼이 어마어마하다.
중간에 San Pedro 작은 마을을 지나친다. 언뜻 듣기로 배 한 번 타고 건너가는 곳이 있다는데 여긴가?
사람들이 워낙 자주 들락날락하는 통에 어렵지 않게 배 타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마을 사이를 이어주는 통통배인데, 배가 오고 가는 폭이 얼마 되지 않아 무척 짧은 거리다. 한 2~3분 정도 탔나? 1인에 0.9유로다.
까미노 중 의외의 곳에서 배를 타니 액티비티를 하는 것 마냥 설렌다. 나만 그런 게 아닌 게 엄마도 은근히 신나 보인다. 북쪽길만 기다렸던 엄마가 즐거워하는 눈치니 다행이다.
배에 내리고 길을 이어가는데 단번에 산으로 안내한다. 그런데 바다와 산 이게 이렇게 무심하게 툭 나와도 되는 조합인가? 예고 없는 절경이 펼쳐진다. 찬란하다 찬란해.
어디나 그러듯 일상이 되면 무심해진다. 물놀이 중 수영복을 입은 채 산을 넘는 동네 사람들은 익숙한 듯 경관을 스쳐 지난다. 우리에겐 이런 그들도 풍경이다.
한참을 헥헥거리며 돌계단을 오르다가 시선을 돌리면 등 뒤로 바다가 펼쳐진다. 자린고비 굴비 보듯 세 걸음 올라가고 뒤돌아 바다를 한 입 베어문다. 이게 북쪽길의 맛인가 보다. 첫날부터 어마어마하다.
스틱이 없었다면 고생 좀 했겠다. 나는 스틱을 잘 사용하는 편이 아니라서 따로 서울에서 챙겨 오지 않았는데, 북쪽길 초반이 워낙 험하다고 해서 그저께 산티아고에서 스틱을 하나 구입했다. 난 참 말을 안 듣는 편인데 이번엔 아빠 말 듣기를 잘했다. 저렴이가 제 몫을 톡톡히 한다.
오르락내리락 몇 번을 반복한다. 한창 산 중턱에 올라가니 발아래로 파도 소리가 들려 아래를 내려다봤다. 저기가 산세바스티안인가 보다. 누가 봐도 대단한 휴양지 도시의 냄새가 절로 난다. 잔잔한 바다 파도 사이로 까만 점들이 콕콕콕콕 해변에 박혀 있다.
산세바스티안은 미슐랭 맛집이 인구 대비 가장 많은 곳이라고 알려질 만큼 미식의 도시이고, 서핑 관광객이 줄지어 찾는 유명 휴양지이기도 하다. 또 매년 국제 영화제까지 열리는 곳이라고 하니 도시의 콘텐츠가 미치게 풍성한 곳이다. 그림 같은 곳이었다. 그냥 건물만 봐도 그렇고, 해변에서 노는 사람들도 그렇고, 좋은 레스토랑과 상점이 블록 하나를 지날 때마다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
저기 보이는 조명 가게에 들어가 물건도 구경하고, 해변 노천 가게에 앉아 식사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40일을 넘게 길에서 굴러 까맣게 그을린 얼굴, 푸석푸석한 머리, 씻어도 어쩔 수 없는 후줄근함이 이 도시에서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행색이야 그렇다 쳐도 구경거리 먹을거리를 하나하나 다 알아보고, 이것저것 동행자를 고려하면서 이끌고 다니자 생각하니 또 그것마저도 버거운 일처럼 느껴졌다. 모든 일이 성가시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이곳에 왜 이러고 있는지 이유를 잃어버렸던 때가.
미슐랭 별이 반짝이는 이곳에서 피자헛 12유로짜리로 저녁 끼니를 대충 때웠다. 더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찾고 제안하는 것도 골치 아팠다. 가장 만만한 메뉴 선정과 장소 안내로 오늘 나의 업무를 종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