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그만두고 스페인 여행길에 오른 30대 딸, 은퇴 후 인생 후반전을 시작하는 부모님과의 140일간 산티아고 순례 배낭여행을 기록합니다.
아니 세비야가 이렇게 크다고? 은의 길 시작점 세비야는 내가 생각했던 도시 크기 그 이상이었다. 고백하자면 세비야에 대한 배경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로 도착했던 터라, 도시 풍광이며 관광객들이며 세상 즐길거리가 즐비한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이런 곳인 줄 알았으면 하루를 미리 빼놓고 올 걸.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아빠는 까미노 크리덴셜 발급과(일종의 순례자 여권으로 도착지 점마다 도장을 찍음) 세비야 대성당 스탬프를 찍기 위해 서두르기만 했다.
아차 아빠 성격을 잠깐 잊고 있었다. 꽂힌 것만 집중하는 몰입력.. 아주 오랜만에 그것도 타지에서 아빠 성격을 직면하니, 나도 모르게 조용한 ‘욱 wook’이 나왔다. 벌써부터? 첫날인데?
천천히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노천카페에도 앉아있고 여유롭게 도시를 즐기면 좋을 텐데 세비야 대성당 사무실 근무시간이 끝나가니 안절부절못하고 서두르는 아빠 모습에 내적 욱이 2차로 올라왔다. 그래 나는 여기 놀러 온 게 아니다, 그들이 주인공이고 나는 가이드 역할로 도울뿐이다.라고 마음을 되잡지만, 이미 나는 삐쳐 있었다.
시몬 호텔에서 크리덴셜을 구입하고, 어찌어찌 세비야 대성당 사무실에서 스탬프까지 모두 받았다. 숙제가 모두 끝난 후에야 아빠는 주변 환경과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는지, 짜증이 묻어있는 내 얼굴을 뒤늦게 감지한 듯했다. 노천 레스토랑에 앉아 맥주 한 잔 하고 가자고 했지만 싫었다. 세비야 중앙 광장도,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 구조물이라고 하는 것들도 다 뒤로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첫날부터 삐그덕거린다.
숙소에 돌아와 내일을 준비했다. 이제부터는 찐이다. 긴 여행의 진짜 시작이다. 배낭이 피부가 되고, 저 부츠가 발이 된다. 한동안은 바퀴 달린 것들 ‘타지’ 못한다. 오로지 내 발로만 나아갈 수 있다.
빠뜨린 것이 없는지 짐을 다시 체크하다 보니 앞으로 시작할 행군에 대한 긴장감이 살짝 감돈다. (삐친 건 뭐 금방 풀린다)
산티아고 순례길이라고 하면 프랑스 남부 국경마을 생장 피에 드 포르에서 시작해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끝나는 프랑스길이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매해 전체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자의 70%가량이 프랑스길을 걷는다고 한다. 반면 이번 여행의 첫 코스로 시작하는 은의 길은 전체 순례 여행자의 4% 내외만 집계가 되는 곳으로, 까미노 코스 중 가장 난도가 높다고 알려져 있다. 1,050km에 달하는 긴 거리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스페인 내륙을 가로질러 올라가는 루트라 평균 기온이 높고 볕이 매우 뜨거운 편이다. 긴긴 초원이나 논밭을 지나가는 구간에서는 엉덩이 붙이고 제대로 쉴 수 있는 곳을 찾기도 어렵다. 이렇다 보니 순례객의 나침반으로 통하는 노란 화살표가 제대로 설치되거나 그려질 리 없으니 불친절한 길로도 유명하다.
이래저래 힘들다고 알려져 있는 은의 길을 먼저 걷는다. 은의 길을 걷는 시기는 여느 순례 코스보다도 중요한데, 3~5월, 10월 정도가 최적이다. 6-9월은 기본 35도는 쉽게 넘어가고 최고 44도까지도 올라간단다. 우리는 4월 초에 시작해서 5월 중순에 끝내는 계획이다. 뭐 물론 시기를 잘 맞췄다고 해서 힘든 게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다.(ㅋㅋ) 당시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 후회와 다짐을 반복했었다.
출발할 때야 앞으로가 얼마나 지난할지 자세히 그려보기 어렵다.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힘든지 알았다면 시도도 못했겠지 싶다. 이렇게 고단한 길의 여정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