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도-영하2도
11월엔 절대 패딩을 꺼내고 싶진 않았지만 패딩을 꺼냈다. 자다가 추워서 오들오들 오리털 이불을 꺼내 덮었으니.. 4일이라는 롱위켄의 첫 날의 시작이다. 주말에서 하루 더 쉰다고 롱위켄이라니 참, 긴 것도 그렇게 없을까. 적당한 시간(12:45 - 24시간 시계 기준)에 일어나서 적당히 빈둥대고 적당히 밥을 먹었다. 일정하지도 않은 기상시간은 왜이렇게 잘 기억하는지.
요즘 계속 잃어버린 유럽여행 이전의 만족스러운 생활에 대해 고심 중이었다. 뭐가 빠졌는지. 다시 돌아가고 싶은데 왜 못 돌아가는 지, 그땐 뭐가 있었길래 대체 그렇게 안정적이고 만족스럽게 살았을까. 유럽을 다녀온 이후부터는 왜 한 번도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내고 있지 못하는 걸까.
그러다가 어느순간부터 ‘어차피 읽지도 못할 책 빌리지도 말아야지’하며 근처도 잘 가지 않던 도서관에 간만에 가보았다. 책을 빌린다면 빌리고 안빌린다면 마는거지뭐. 하면서 던킨에서 프로모션으로 사먹을 커피를 위해 봉투저금통에서 2.18 달러를 맞춰서 꺼낸다. 투덜거리며 패딩을 첫 개시를 하고 길을 나서서 도서관을 간다.
눈만 뜨면 도서관으로 직행해서 마감할때까지 있다 나오던 생활을 떠올려 본다. 도서관 영업시간을 기억하고 그 시간에 맞춰서 생활하고 던킨 프로모션 시간에 맞춰 잠깐 걸어다니던 그때. 뭐 내일부터 도서관엘 가자고 다짐 비슷한 걸 해보지만 뭐 내일의 지은이가 하고싶다면 하겠지.
도서관에가서 한국책 코너로 직행한다. 언제나 컴퓨터를 쓰는 여섯개의 좌석들은 만석이다. 시도는 해봤지만 언제나 실패. 이젠 도전조차 하지 않는다. 네 개 반 정도의 셸브 중에서 왼쪽의 세 개를 먼저 둘러본다. 왼쪽부터 음식, 조리법, 기획 등 실용적인 부분에서 에세이 등을 거쳐 맨 마지막엔 소설과 같은 한국 문학, 다음엔 외국 문학 번역서로 끝난다. 항상 왼쪽부터 시작하는데 한개 반의 셸브를 둘러보다 보면 이미 다섯권의 책이 들려져 있다. 나머지 한개 반의 셸브를 보며 뺄 책은 빼고 더 읽고 싶은 책을 바꿔 안는다. 끝내 제일 오른쪽까지는 다다르지 못한다. 다음번엔 쫌(부산 사투리의 쫌~!!) 오른쪽부터 시작해야지.
책을 고르는 기준은 딱히 없는 것 같다. 워낙 방대한 관심사 덕분에. 저번에 읽고 싶어서 안았다가 내려 놓은 것, 다른 책들 읽느라 다 못 읽고 내려놓은 책들, 단 한 페이지도 읽지 못하고 통째로 반납했던 리스트 중에 있던 책들, 내가 읽고 싶어서 도서관에 신청했더니 사줬던 책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 거침없이 고른다. 다섯 권을 고르고 대출까지 해서 나오는 데 2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다. 오래 걸린 건가?
바로 던킨을 가려했는데 언제나 그랬듯 양팔이 무거워 집에 들려 책을 놓고 간다. 바로 직전에 빌린 책들을 읽지 못한 채 통째로 다 반납한 기억에, 이 책들도 과연 다 읽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자책과 같은 한숨을 쉰다. 그러다 갑자기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2주에 한번씩 토요일마다 학교를 갔을 때 나오던 통신문이 있었다. 그 때 ‘다독학생’란이 있었다. 그냥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빌린 학생의 이름이 올라가는 곳이었는데 뭔가 내 이름이 찍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책을 엄청 ‘빌렸다.’ 21권 정도를 빌렸던 것 같은데 그 중에서 읽은 것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 시절 도서관에서 기억 나던 건 단지 큰 한글 사전이 있던 것과 ‘토지’ 장편소설이 너무 많다는 것 정도? 무슨 책을 빌렸는진 전혀 기억안나고 그저 열심히 빌리기만 했고 결국 3등으로 책을 많이 빌렸던게 기억이 났다. 혼자 웃으면서 걸어가는데 여기 도서관에서도 그냥 그렇게 마음 편하게 빌려가기로 했다. 읽던 안 읽던, 읽느라 다른 것을 못하던 아무것도 안 읽고 다른 것도 못하던, 그냥 빌리기로. 잃어버렸던 이전 생활의 요소들을 하나씩 끼워가기로 했다.
집에와서 그 따스함에 유투브를 켰다. 오늘도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논노난나 패셔니스타 할머니의 영상으로 나를 이끌고 같다. 옷장을 소개하는 데 뭔가 북받쳤다. 나도 갔던 밀라노에 그 거리를 못가봐서 그런게 아니라 그냥 존경심?도 아니고 복잡한 마음이었다. 감동쪽이라고 해두자. 20년 동안 신고 계신다는 가죽신발을 보며 7년째 신고 있는 내 짚신 컨버스를 떠올렸다. 이제부터 가죽 컨버스를 사야하나.. 그렇게 내 옷장을 보니까 나도 꽤 옷들마다 사연이 있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있구나. 미국오는 짐을 서울생활 정리부터해서 15시간만에 처음부터 다 싸야할 때 그 충격이 꽤 효과가 있었나보다. 꽤 옷이 많고 쓸데없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3시가 지나서야 던킨으로 나선다. 유투브를 한창 보니 책들이 갑자기 재미없어 보인다. 아 이러면 안되지.
커피 마시며 유투브를 보고 군것질을 한다. 거기다 술마시기 까지 하면 이 짓도 두달 째인데 뭔가 슬슬 질리기 시작한다. 인스타 스토리를 보는데 제제를 포함한 모두가 약간 침체기? 슬럼프기?인 것 같다. 업무가 다 같이 많아지는 시기(그럼 다같이 줄이면 되지 않나?)이며 사람들 문제에 힘들어지는 시기이고 자신은 잊어버리며 그만큼 스트레스가 많아서 레스토랑들이 잘되는 시기인 것 같다. 나도 먹성터지는 시기였지.. 후 그래도 이제 책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식욕이 떨어졌기 때문에.
‘밤이 선생이다’ 책을 읽는다. 근데 두 장을 읽자마자 역시 덮어버린다. 생각들이 너무나도 샘 솟아서. 이 생각들을 내가 공유할 수 있을까. 왜 공유해야하지? 너무 아까운데? 남들 알려주기 싫어, 아깝잖아. 나만 알고 있어야지. 하는 생각. 그러면서도 한 편엔 내 생각 같은 것을 남들에게 알려주기 무섭다는 생각. 욕심 많은 내 심보도 있지만 이전의 상처들이 문득 떠올랐다. 글 진짜 못쓴다고, 무슨 말 하려는지 못 알아듣겠다고, 나름 에디터라는 이름을 달고 생활 했던 잠깐 반짝였던 시기는 너무 반짝이고 끝나 버렸고, 에세이를 쓰기만 하면 미국적으로 생각하라고, 가장 최근엔 영어 문장들이 너무 틀린게 많다고 라이팅 센터에 연결해주신다는 교수님, 그러고도 100점을 주셨기에 뭔가 뒤숭숭한데 더 현타인 듯한게 왔고, 공모전에 글을 마감 몇시간 전에 쓰면서 이제껏 내가 에디터라 말하고 다녔던 것에 대한 회의감들이 스쳐지나갔다. 난 그래서 뭐하는 애지? 라는 의구심이 드는 것과 함께.
조심스럽게 펼쳐놓은 내 전부인 글(이라기 보단 얼마 없는 내 감정에 가깝다)이 그렇게 까여서 그 충격에 모든 걸 놓아버린 걸까. 흠. 내가 한창 나이브 해서 보여주는 글과 내 글을 구분하지 못했던 때도 있었지. 근데 그렇다고 나 혼자만 알고 지내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껀데. 아니 귀찮은 것도 귀찮은 건데(피식) 흠 아직 뭐 때가 아닌가보지. 더 축척하자. 책을 많이 읽다보면 쓰고 싶을 때가 있겠지. 이번 브런치북은 물건너 갔구나. 소설도 쓰고 싶고, 바보북스처럼 자타공인 책덕이 되겠지?
나가려다가 지갑을 까먹어서 한번에 쑥 안들어가는 운동화에 발을 낑겨넣으면서 이제 어느덧 11월이니 올해를 정리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 올해의 테마를 대충 생각해보니 내 자리, 위치, 역할, 분야를 확고히 하는 1년이었달까. 유럽 여행로 그려진 내 미래도 그렇고, 일하는 곳에서도 사람들 대하는 방법과 내 승질도 그렇고 이제 대학 발표나면 그 쪽으로의 내 위치도 그렇고. 이전의 2년이 개론의 초반부였다면 올해는 개론의 마지막과 끝나는 부분이랄까. 내년엔 전문화하는 한 해로 테마를 잡아야겠다.
이렇게 다짐하거나 하는 어투로 글을 끝내긴 싫었는데 뭐 완전히 그 쪽도 아니고 아닌 쪽도 아니니 괜찮은 걸로 하자. 어, 내 눈 앞에 마침 어제 마시다 남은 와인이 보이네. 아잇 이것 참 어쩔수 없구먼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