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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랑 Nov 10. 2019

유일하게 있는 손재주라곤 글자를 쓰는 걸 좋아한다는 것

한 편의 글을 쓰는 것 말고

고등학교 수업시간 때 미움과 배신의 대상이었다. 그림도 못 그리고 종이접기도 못하고 요리도 못하고 손으로 잘하는 거라곤 정리정돈과 글자를 쓰는 것이다. 그마저도 손에 힘을 많이 들여서 쓰는 편이라 오래 못쓰지만 글자를 쓰는 것을 좋아했고 아직도 좋아한다. 특히 연필로. 연필의 그 빨리 뭉뚝해지는 것이 나중에 보기 불편할 때는 마음 아파하며 샤프로 쓴다. 크흡



미움의 대상이 된 즉, 고등학교 때도 쓰는 걸 좋아해서 수업시간 중에 막 필기하자고 외쳤던 순간들이 있다. 그럼 그 당시의 반 정원이 36명이었는데 한 20명 정도가 ‘하, 쟤 또 저래, 암튼 난 안써’고 8명은 적극적으로 눈총을 보내며 나머지는 결석이거나 예체능이라서 이미 자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배신의 대상이 된 이유는 고등학교 2학년 말 수학시간 때였다. 복잡하고 쪼잔하며 굳이 심오한 한국 특유의 수학에 수2 이후부터는 단순히 한번의 설명을 듣고 보고 이해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땐 그렇게 머리가 지금처럼 팽팽 돌아가지 않았다. 난 수업시간 이외에는 공부란 걸 하지 않았으니 자연스레 놓치게 되었고 그 뒤로는 이해는 물건너 갔지만 열심히 필기를 하고 예쁘게 받아적었다. 그때 제비뽑기의 여파로 앞에서 두번째 제일 가운데 자리였으니 모범생으로 충분히 보였을 것이다. 근데 내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게되었을 때 선생님의 그 표정이란.



이전부터 이상하게 전체 중에서 부분 하나에 꽂힌다. 그래서 결국엔 다른 사람과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 차이점은 그 동기랄까. 어떤 자격증을 따야한다는 같은 결론이 있으면 대부분은 전공 관련 자격증이라 딴다. 그리고 비전공자인 나에게 왜 그 자격증을 따려고 하는지 물어본다. “조금만 공부하면 알 쉬운 것들인데 모르는게 짜증나잖아.” 라고 대답하면 돌아오는 건”허, (역시 정상은 아니야)”. 익숙하다. 수학말고 다른 고등학교 수업 시간엔 무조건 자거나 말썽을 피우는 다른 예체능 아이들과 달리 책을 읽거나 필사를 하거나 또 뭔가를 썼다.(물론 종종 자기도 했지만) 그럼 선생님들도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라서 “크흠흠”하며 지나가신다. 그 책들이 육아책이라 더 그랬던 건가? 아무튼.



이미 널리 알려진 교육 체계를 벗어나 혼자 공부를 하려고 그 방법을 고민할 때, 넘쳐나는 관심 분야에 대한 넓고 얕은 지식을 얻기 위해 최고의 방법이 자격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세상과(부모님 포함) 최고의 타협점이라는 것도.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한 과거와 미래의 나와도. 나야 뭐 취직이 목표도 아니고 그 자격증으로 뭔갈 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내 공부 목표와 되게 잘 맞는 방법이라서.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지와 뭐가 불필요한데 낭비하고 있는지, 누가 나에게 사기를 치고 있는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는 정도(그에 대한 예방도), 그리고 그 분야에서의 도움이 필요할 때 누구에게 부탁해야하는지 정도의 개괄적인 부분을 커버하기엔 자격증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사장마인드다 아주, 재수없게



이제야 공부머리가 트인 건지 아님 연륜에서 나오는 공부 짬인지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요즘에도 손글씨 사랑은 유용하게 쓰인다. 각잡고 공부하거나 ‘이 두뇌야! 일을 해! 기억하란 말이다앗!!!!!’ 하며 머리를 팡팡 두드리며 자책하는 것은 죽어도 싫은데 기억은 해야할 때. 그저 따라 적는다. 영단어를 외우든, 신문을 읽든. 종이를 아껴서 나무를 살리는 것에 반하는 건 둘째치고 자연스레 집중력이 흩어져 딴 생각이 들더라도 손이 아파서 못 쓸 지경까지 쓴다.


많이 쓰면 손이 외운다는 데 그런 건 뭐 이미 예전부터 바라지도 않았고 그 쓴 것에 대한 지식이 남아있는 지는 중요하지 않고 그냥 열심히 썼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만 얻어간다. ‘이거라도 좋아하지 않았으면 난 정말 바보가 되었을 거야. 만족해’ 라며 위안하지는 않는다. 한 3퍼센트 정도는 있겠지.



어렸을 때 매 주 300-500개 정도의 영단어를 강압적으로 외운 그 썩 기분 좋지 않은 그 기억 때문일까.(결론적으로 어른이 돼서 다시 그 영단어들을 떠올릴 때 뜻 대신 좋지 나쁜지 그 느낌만 기억나는 기이한 현상에 부질없음을 느꼈다.) 완벽주의의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무력감을 최소화하려는 나만의 생존 전략일까. 아무튼 수험생활을 벗어난 자율 공부인으로써는 더할 나위 없는 공부법인것 같다. 외적 압박감이 없는 것이 공부의 첫 단계이니, 내적 동기를 키워 자연적으로 의자에 앉게 만드는 것. 의자에 앉는 것이 부담이 돼 피하지 않거나 도망치지 않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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