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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식 Mar 05. 2017

그 문을 열어야만 했을까

<부산행>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는 충분히 알겠다. <부산행>에서 정부는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를 두고 전국단위 과격 폭력시위 사건으로 무마하기 위해 애쓴다. 아니, 정말로 무능하여 폭력시위 사건으로 알았는지도 모른다. 국민 여러분의 안전에는 이상이 없다고 하는 정부 관계자의 목소리와 더불어 카메라는 도시 곳곳에서 화재가 나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도시를 익스트림 롱 쇼트로 바라본다. 정부 관계자의 말은 이미 헛소리가 된 지 오래다. 카메라는 이후 부산행 KTX에 탑승한 인물들을 비추며 비판의 대상을 정부에서 개인으로 전환한다. 석우, 상화, 영국은 힘겹게 좀비 떼를 물리치고는 성경, 수안, 인길 그리고 노숙자를 만난다. 석우 일행은 나머지 생존자들과 만나기 위해 노력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그들이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거라는 두려움에 나머지 생존자들은 출입문을 막는다. 석우 일행은 힘겹게 출입문을 뚫지만 이내 다른 칸으로 넘어가라는 사람들의 거센 고함 속에 맹렬한 질타를 받으며 어쩔 수 없이 다음 칸으로 넘어간다. 이때, 문제의 장면이 등장한다. 인길의 동생인 종길은 좀비가 되어버린 인길을 보고는 갑자기 객실의 출입문을 연다. 결국 용석과 승무원 기철을 제외한 나머지 생존자들은 전부 죽는다. 이 장면에서 종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캡처 1] 석우 일행을 살려야한다는 진희의 간절한 하소연을 외면하는 종길.

 이전 장면으로 되돌아가 보자. 나머지 생존자들과 함께 있는 진희는 영국의 문자메시지를 통해 석우 일행이 살아있음을 깨닫고 석우 일행을 구해야 한다며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용석은 석우 일행이 감염되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냐며 거세게 호통 친다. 용석의 외침에 대한 사람들의 무언의 긍정 속에서 카메라는 조용히 그들에게 벗어나 우측으로 패닝 하여 종길을 바라본다([캡처 1]). 종길은 진희의 간절한 하소연은 외면한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 종길은 이미 인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종길은 진희에게 다가가 석우 일행 중에 할머니는 없냐며 영국에게 연락해보라고 시켰을 것이다. 종길은 인길의 죽음 이외에 나머지 사람들의 생사는 전혀 관심이 없다.


[캡처 2] 종길은 좀비가 되어버린 인길을 보고는 최악의 행동을 저지른다.

 물론, 그럴 수 있다. 자신의 목숨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찌 모르는 사람의 생사까지 신경 쓸 수 있을까. 이후 석우 일행이 출입문을 뚫기 위해 나머지 생존자들과 사투를 벌이는 씬(scene)에서 종길은 인길이 아직 살아 있음에 놀라고 뒤이어 인길이 좀비에게 물리는 장면을 보고는 더더욱 놀란다. 그리고 석우 일행이 다른 칸으로 이동한 후 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끔 나머지 생존자들이 반대편 출입문을 막는 사이 카메라는 또다시 조용히 그들에게 벗어나 트랙 아웃하여 종길을 바라본다. 종길은 ‘왜 자기 살 궁리는 안 하고 다 퍼주기만 하고 힘들게 살았냐’며 좀비가 되어버린 인길을 향해 나무란다. 종길이 뒤를 바라보자 카메라는 서글픈 음악과 더불어 출입문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을 슬로우 모션을 통해 보여준다([캡처 2]). 그리고 종길이 던지는 한마디. “놀고 있네.” 이전 [캡처 1]의 장면과 동일하게 짜인 [캡처 2]의 구도는 종길의 불쾌하기 짝이 없는 서사를 진행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명백히 기능한다. 즉, 종길은 인길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자살하기 위해 출입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출입문을 연다.


 우리는 슬로우 모션 처리되어 살기 위해 발악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순간적으로 종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생존자들이 석우 일행을 막지 않았다면 인길은 적어도 그 장면에서 만큼은 좀비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윽고 떠오르는 질문. ‘도대체 종길은 인길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종길은 이미 인길이 죽었다고 깨닫고 망연자실해하지 않았는가? 종길은 인길이 살아있는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종구 일행을 막으려는 사람들을 제지하거나 소리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놀랄 뿐이다. 왜 자신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선 남들 탓만 하는가? 자신 또한 ‘놀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가? 종길은 꼭 문을 열고 사람들을 죽여야만 했는가?


  <부산행>은 갑자기 들이닥치는 ‘좀비’라는 재난을 통해 이를 맞닥뜨리는 이기적인 정부와 개인을 비판하고 더 나아가 그 속에서 살아있는 휴머니즘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의 마지막, 석우는 성경과 수안을 구하기 위해 좀비가 되어버린 용석과 사투를 벌이고는 결국 자신도 좀비가 된다. 석우는 영화 초반 수안의 생일도 기억 못 하는 정 없는 아버지였지만 목숨을 잃는 그 순간이 돼서야 수안이 태어났을 때 흐뭇하게 바라보던 자신을 회상한다. 카메라는 석우가 수안이 갓난아기였을 당시를 보여줌과 동시에 서정적인 음악을 통해 노골적으로 관객들에게 휴머니즘을 느끼도록 강요한다. 분명 과잉이다(그것도 엄청난). 하지만 석우를 비롯하여 영화 내내 인간다움을 지키는 인물들의 휴머니즘은 그래도 나름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사람의 목숨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다. 그러나 종길은 다르다. 종길은 아무 행위를 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남들을 평가하고는 기꺼이 살인과 다름없는 행위를 저지른다. 그리고는 석우 일행을 거칠게 몰아내던 나머지 생존자들을 손수 처단했다는 이유만으로 영화는 그 살인을 석우 일행의 휴머니즘으로 탈바꿈한다. '선인 vs 악인'이라는 노골적이고 기만적인 프레임 속에서 종길은 어느샌가 석우 일행과 동등한 '선인'의 위치에 자리한다.


 <부산행>에 등장하는 최고의 악인을 고른다면 대부분 용석이라 대답할 것이다. 용석은 영화 내내 자신의 목숨을 위해 남들을 좀비 떼로 밀어 넣으며 살아남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적어도 용석이 진희에게 “감염됐는지 안 됐는지도 모르는데 여기로 들여보내자고?”라며 일갈하는 장면만큼은 용석을 악인의 프레임으로 볼 수 없게 만든다. 그의 말대로 석우 일행이 감염되었다면 열차의 승객들은 전부 사망했을 것이다. 용석과 나머지 생존자들의 행동은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일견 이해될 수 있는 행동이다. 하지만 이들은 휴머니즘의 탈을 쓴 종길을 통해 단죄된다. 석우가 갓난아기였을 때의 수안을 회상할 때와 마찬가지로 카메라는 종길을 통해 관객들에게 휴머니즘을 강요한다. 하지만 이 장면의 휴머니즘만큼은 한참 잘못되었다. <부산행>에서의 최고의 악인은 용석이 아닌 종길이다. 종길은 꼭 그 문을 열어야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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