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사랑이라는 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람 마음에 사랑이 어떻게 피어나는지 궁금해하던 때가 있었다. 바로 그 시절에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러브 온톨로지>, <사랑의 기술> 등의 책을 찾아 읽었는데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처음 알게 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제목에 이끌려 책을 살피던 중 저자가 신형철 평론가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 후에는 별다른 고민 없이 이 책은 읽어보고야 말 테다 하며 장바구니에 넣어놓았다. 하지만 장바구니 속 다른 책들에 밀리고 밀려 빛을 발하지 못하던 중, 최근 책 친구 한 명이 책을 선물해주겠다며 고를 기회를 주어서 주저 않고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골랐다. 이 책을 선물해준 친구는 나의 선택에 살짝 머뭇거리며, 이게 영화에 관한 책인데 보지 않은 영화가 대부분이라서 본인은 결국 읽다가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나는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 영화에 관한 책인지 그때야 알았다. 살짝 아차 싶었지만 (나는 영화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래도 신형철이니까 기대를 안고 읽어보았다.
선물 받은 책은 부담스러워서 리뷰를 잘 쓰지 않는데 (부정적인 말을 자주 하는 타입) 이번에 받은 책들은 다 올리기로 결심했다. 좋은 마음으로 좋은 말을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전에 읽었던 <느낌의 공동체>보다 대중적인 주제라서 일까, 그보다는 수월하게 읽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장면, 공감이 되지 않는 분석 등 어려운 부분은 물론 있었지만 (꽤나 많았지만) 나는 재밌게 읽었다. 그것도 꽤 빠르게.
'사랑의 논리', '욕망의 병리', '윤리와 사회', '성장과 의미' 총 4개의 주제로 나누어져 있어서 하루에 한 섹션씩 4일 동안 읽었는데, 그것도 재미있어서 더 읽고 싶은 걸 머릿속에 한 주제에 대해서만 남기고 싶어서 일부러 책을 덮었다. 아껴읽은 셈이다. 내가 애초에 궁금했던 '사랑'에 대한 논점은 첫 장인 '사랑의 논리'에서 다루었고 나머지 부분은 크게 상관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사랑을 뒤따르는 욕망, 질투, 윤리, 도덕, 그리고 내면의 성장까지도 포함한다면 이 책이야말로 '정확한 사랑의 정의'일 것이다.
나는 영화를 즐겨 보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영화 보기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시간이 생기면 하고 싶은 것들 중 순번이 뒤에 있어서 보고 싶은 영화는 쌓이는데 영 봐지지 않는다. 그 결과 남들이 "이걸 안 봤다고?!" 할만한 영화도 보지 않아서 사람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으니 '보고 싶은 영화'리스트가 더 늘어버렸다. 책에서는 총 3~40편 정도의 영화가 언급되는데 그중 내가 본 것은 5~6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저자가 분석하는 영화의 내용과 의미를 함께 파헤치는 즐거움은 느낄 수 없었지만, 오히려 궁금했었던 영화의 내용을 (결말까지도) 알려주어서 그대로 흡수하는 재미가 있었다. 영화를 보지 않았는데도 영화와 그 코멘터리까지 모두 관람한 느낌이었달까. 물론 코멘터리라고 하기에는 저자의 말대로 그는 영화 평론가도 아니고 감독도 아니지만 예술의 의미는 결국 개인이 받아들이기 나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의 분석에 불편함이 생기지는 않았다. 내 생각을 빗대어볼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쉬웠을 뿐.
저자는 장승리 시인의 시, '말'의 한 구절을 인용해 책에 제목을 붙였다.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그 문장이 모든 해석자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고 했다.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섬세하게 작품을 해석해서 "정확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그에게는 과제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신형철 평론가가 책 머리에서 밝히듯, 모든 해석에 정답과 오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해석과 더 좋은 해석이 있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저자는 본인이 애정을 쏟은 작품을 능력껏 정확하게 해석했다.
아마도 이것이 모든 사랑의 기초라는 생각이 든다. 대상을 섬세하게 관찰한 후 더 좋은 해석을 보여주는 것. 사람의 알맹이는 제각기 다른데 매번 같은 방식의 사랑이 통할 리 없기 때문에 각각 다른 결괏값이 나와야 한다. 사랑의 대상이 꼭 사람일 필요는 없다. 여담이지만 어릴 적 다니던 성당 신부님이 성경은 서랍 속에 모셔두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했다. 지금은 성당을 다니지 않는데도 그 말이 두고두고 남았는데, 그것이 아마 성경을 "정확하게 사랑"하는 법을 처음 배운 순간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신형철 평론가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은 이렇듯 영화에 관한 책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내게 남은 것은 옳은 사랑법이다. 앞으로는 더욱 치열하고 세심하게 사랑해야겠다는 다짐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wanna watch list +
케빈에 대하여
더 헌트설국열차
사랑을 받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타인의 사랑은 질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이 질문과 더불어 내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서서히, 어떤 일이 벌어진다. 그 일은 스피노자가 말한 두 가지 방향을 따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커지거나 작아진다. 내 안에 비어 있다 생각한 부분이 채워지면서 커지거나, 채워져 있다 생각한 부분이 사실은 비어 있음을 깨달으면서 작아지거나. 후자의 변화, 즉 타인의 사랑이 내가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결여를 인지하도록 이끄는 것,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타인의 사랑에 응답하게 만다는 하나의 조건이 된다.
이 결말이 뜻하는 바가 절망인지 희망인지를 묻는다면 나는 희망이라고 말할 것이다. 삶에 희망이 있다는 말은, 앞으로는 좋을 일만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건 이후에 그녀는 변하기 시작한다. 어린 케빈은 말한 적이 있다. "사랑하는 거소가 익숙해지는 것은 달라요. 엄마도 나를 익숙하게 여기기는 하잖아요." 사랑할 수 없는 존재에게 16년 동안 익숙해졌을 뿐이었던 에바는 자신이 한 번도 케빈을 진심으로 이해해보려고 노력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마지막 편지를 받고서야 깨닫게 된다.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쉽게 '유죄추정의 원칙'에 몸을 싣는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속담은 유죄추정의 원칙이 대체로 옳다고 우리를 오도한다는 점에서 혐오스럽다. ... 이 소설의 주인공인 사내를 이해하는 길은 오로지 그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방법밖에 없다. ...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와 같은 파이의 믿음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물음이다. 그 믿음이 그를 살게 했고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고통이 닥쳤을 때, 이성으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계속 나아가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 어떤 초월적인 것을 믿기로 결정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