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
안녕, 우리가 만나게 이후로 처음 쓰는 편지네. 나도 참 무심하지 어떻게 너에게 편지 한 번 쓸 생각을 안 했던 걸까? 지금 생각해보면 난 네가 사랑이라고 느낄 수 있는 것 들 중, 과연 어떤 것들을 '잘했다'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괜스레.
현범 선배가 어느 5월의 주말 오전에 처음으로 개인적으로 연락이 와서 아주 친한 동생을 소개해준다고 했을 때, 사실 망설였었어. 너에게 이미 솔직히 다 말하긴 했었지만 늘 나보다 나이 차이가 훨씬 많이 나는 연상만 만났던 내가 동갑내기인 널, 심지어 직장인도 아닌 인테리어 프리랜서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과연 우리가 공통 관심사는 있긴 할까, 시간을 낭비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고 선배가 마침 보내온 사진 속의 너의 모습은 너무나도 마초스러워 보였거든. 내 머릿속의 지우개에 나오는 정우성처럼 말이야, (물론 그만큼 잘생긴 건 아니었지만) 하지만 내가 워낙 좋아하던 선배였기에, 이 선배가 아주 친한 동생은 어떤 사람일까 호기심에 알겠다고 대답했던 것 같아.
그 후, 한 2-3주가 흘러서 만나게 된 네 첫인상은 사진과는 또 다르게 키가 아주 크고 마른 목수 같은 느낌이었어. 아주 첫인상은 말이야. 아주 편해 보이는 검정 티셔츠, 아주 편해 보이는 청바지, 아주 편해 보이는 운동화를 신고선 늦어서 미안하다며 헐레벌떡 약속 장소로 와서는 급하게 주문을 하더니, 화장실을 좀 다녀오겠다며 종종걸음으로 뛰어가는 너의 뒷모습을 보며 난 예감이 좋지 않았어. 이 친구도 마지못해 나온 거구나, 나도 마찬가지인데 말이지.
그렇게 브런치 플레이트 두 가지를 시켜놓고 마주 앉아 우리는 정말 몇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른 채 쉬지 않고 얘기를 나눴었어, 그때도 뭔가 이성보다는 친구로 또 동생처럼 느껴지는 네가 심지어 전 직장 선배의 친한 동생이 아닌 아주 가까운 사촌 형제 지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난 네가 굉장히 편하게 느껴지고 또 진심으로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아. 이성 친구로는 발전하지 못하겠다는 생각도 계속했고 말이지
그때, 그날을 생각하면 턱을 괴고 날 똑바로 바라보며 혹시 SKY를 나오는 게 세상을 살면서 중요하냐고 묻던 네 얼굴이 떠올라. 직장 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러는데 나도 혹시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냐고 묻던 네게 너무 순수하고 순진무구 해 보이는 네게 난 아마 그때부터 벽을 허물었는지 모르겠다.
마치 내가 너에겐 너무 성숙한 인격체인 듯, 혹은 너무 편한 친구인 듯 예전 소개팅 실패 얘기까지 허물없이 얘기를 하는 네 태도에 난 오늘이 마지막 만남이 되겠구나 생각을 했어, 마음속으로 이렇게도 순수한 너를 만나기엔 내가 너무 때가 타버린 사람이라 너 같은 사람은 내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 같아.
빈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네가 혹시 저녁에 다른 약속이 있는 건지 물었어. 난 내심 기뻐하며 그냥 가서 쉴 생각이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지, 그런 내게 넌 같이 영화를 보지 않겠냐고 물었고 넌 그날 내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며 웃고 행복해하는 옆모습을 보며 날 또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었다고 말했었지.
난 그날, 네가 영화관에서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는 우리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제 이상형은 동갑이에요 라고 말하던 순간에, 본인 덩치에 맞지 않는 옛날 아빠 친구 목수 아저씨가 타고 다닐 법한 차에서 내려서 수줍게 악수를 건네며 '다시 한번 볼 수 있을까요?'라고 말하던 너를 나도 모르게 좋아하게 된 것 같아.
매 번 왕복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달려왔던 사람,
표현이 솔직하고, 숨김과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
자기 이상형은 동갑이라며, 동갑인 내가 너무 좋다던 네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