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는 이동진 영화 평론가가 1999년부터 2019년까지 기록한 평론한 영화를 추려서 담아낸 책이다. 분량은 무려 900page이며, 총 208편의 방대한 영화를 다룬다. 39,000원이라는 가격 역시 만만치 않다. 이 책은 내가 가지고 있는 책 중에 가장 비싸고, 가장 두꺼우며, 마지막으로 이동진 평론가 책 중에선 가장 좋아하는 책이다.
그도 그럴 것이 208편이나 되는 리스트라 일일이 나열하기 어렵다. 평론집 첫 글은 영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시작으로 206편을 지나 토드 헤인스의 "벨벳 골드마인"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꼭 별점이 우수한 영화만 리스트업 된 건 아닌듯하다. 평론가님이 5점 준 영화가 전부 있는 건 아니고, 심형래 감독의 디워에 대한 평은 있는 걸로 봐서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그럼에도 못 본 영화가 천지다. 그나마 국내 영화는 반쯤 봤지만 외국 영화는 보지 못한 영화가 많다. 그러다 보니 건너가면서 읽었다. 평론집에 실릴만한 영화라면 언젠가는 볼 가능성이 높은데, 그럴 때 영화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평론가님은 어떤 영화는, 영화가 끝나는 순간부터 다시 시작된다는 말을 한 적 있다. 실제로 그렇다. 좋은 영화를 보면 영화가 마친 뒤에도 되새김질하며 극장 밖을 나선다. 주인공은 왜 그랬을지, 연출, 음악, 미장센, 연기 등을 생각한다. 평론집 제목은 그런 점에서 착안된 듯하다.
글을 쓰면서 평론집을 독후감으로 적는 게 어려운 일임을 느낀다. 208개는 제각기 다른 영화이기에 특정 주제 키워드를 잡아서 엮을 수도 없고, 마찬가지로 줄거리를 요약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며 느낀 3가지 큰 인상에 대해서만 남긴다.
먼저 요약이 좋다. 요약은 이동진 평론가님이 가진 많은 재능 중 내가 가장 부러워하고 좋아하는 장점이다. 만약 어떤 영화를 본 뒤 나보고 10 문장으로 요약하라면 주변부만 맴돌다 끝날 테지만, 평론가 님은 핵심을 콕콕 집어내서 경제적인 문장으로 이야기를 압축한다. 그는 엄청 어려운 영화도 손쉽게 몇 문장으로 인수 분해한다.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에서도 그 장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한두 문단으로 간단히 서사를 압축시킨 후에 감상과 해설을 덧붙인다. 물론 모든 평론에서 동일한 형식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라 지루할까 싶은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두 번째는 배경지식을 채우는 즐거움이다. 예를 들어 홍상수 영화인 "자유의 언덕"에 대한 평에서 여러 근거를 바탕으로 감독이 예전과 달리 "시간"이란 키워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점을 부각한다. 이전에는 없었던 주제가 발화되는 최초 시점을 짚으며 연대기적인 이해를 돕는다. 물론 영화는 온전히 한 편의 영화로만 감상돼야만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나에게 있어 평론가님이 전해주는 배경지식은 더 풍성한 관람을 돕는다.
세 번째는 너무 당연히도, 해설을 지켜보는 즐거움이다. 이 책엔 없지만 평론가님이 5점을 준 "경계선"이란 영화가 있는데, 내게 영화는 3점이었지만 영화가 마치고 듣게 된 영화 평은 5점짜리였다. 이건 무슨 이야기인지,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왜 그렇게 밖에 연출할 수 없었는지,를 듣고 있다 보면 우리가 같은 영화를 본 게 맞나 싶으면서 놀라며, 동시에 그의 평론에 압도당하는 기분마저 생긴다.
영화를 좋아한다면, 이 책을 펴놓고 영화 한 편, 평론 한 편을 야금야금 읽어가는 것도 즐거운 독서법이 될 것 같다. 오래전에 읽은 책이지만, 이제야 후기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