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작가다. 그런 큰 상을 받은 사람은 얼마나 훌륭한 문학을 쓰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이번 독서모임에서 그녀가 1984년에 쓴 "남자의 자리"를 다루기로 했다. 선정 이유는 책이 짧아서. 표지도 예쁘고.
제목 "남자의 자리"에서 남자는 작가의 아버지를 지칭한다. 원작에선 단지 "자리"라고만 쓰여 있던걸, 영어 제목으로 옮겨 가면서 "남자의 자리(A man's place)로 변형됐다고 한다. 원제와 바뀐 제목 중에선 남자의 자리라는 제목이 더 구체적이라서 좋았다.
제목이 그렇게 변형된 만큼,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 서사에 대한 기록이다. 아버지는 노동자 빈민가 출신이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도 못해 글자도 모른다. 삶에서 물질이 첫 번째 우선순위였던 그는 젊은 나이에 공장에서 일하는 엄마를 만나 결혼한다. 가게를 운영하고 공장을 다니는 투잡을 뛰면서 이제는 중산층에 이르렀지만 그럼에도 둘의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다. 두 부부의 첫 번째 아이는 전염병에 걸려 죽는다. 그리고 두 번째 아이로 아니 에르노가 태어난다.
아니 에르노는 비상했다. 그녀는 일단 공부를 잘했다. 취향도 고매했다. 그리고 영어도 잘한다. 후에 대학에선 순수문학을 전공한다. 순수문학이라니, 이것은 아버지 우선순위와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생존, 밥 벌이, 가장의 무게와 같은 것이 중요했다. 그런 그에게 그녀의 취향, 삶, 그녀 자체는 그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말랑말랑하고 순진한 것들이었을 테다.
프롤레타리아에 집안 출신인 이 딸은 부르주아 세계로 진입을 목전에 둔다. 마치 그것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려는 모습은 없다. 오히려 마치 그녀는 본투비 부르주아였던 것처럼 운명과도 같다. 그리고 그녀는 그 운명을 현실로 바꾼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집안을 배경으로 한 남편과 결혼한다. 아버지는 딸이 점점 자신과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사람은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해"와 같은 말을 내뱉는다. 그 세계를 부정하고 겁낸다. 하지만 그의 불안함도 그녀의 삶에 주요한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이 부녀의 개인적, 사회적, 혹은 시대적 갈등은 결국 아버지가 죽으면서 마침표를 찍는다. 물론 그때까지 두 사람이 다투는 건 아니다. 결혼한 후로는 왕래도 적었다.
어쩐지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작가가 아버지와 화해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조금은 더 큰 그릇이 된 작가가 그녀를 그렇게 싫어하고 겁내하던 아버지를 가여워하는 듯했다. 단언할 순 없지만 이 소설을 쓰고 난 뒤에 작가 내면에도 어떤 점이 분명 바뀌었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의 작품은 어려운 책이 많다. 그래서 조금은 걱정하고 봤다. 혹시라도 또 내 사고의 경계를 넘어가는 작품을 만나서 당황하게 될까 봐. 그러나 기우였다. 이 소설은 조금 더 따듯하고, 쉽게 쓰여 있으며, 에세이 같은 기분도 받았다. 그러면서 분명 이 책이 갖고 있는 어떤 시대적, 계급적 갈등과 묘사는 잘 녹여져 있었다. 괜찮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