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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실격 May 15. 2024

갑질의 추억

갑질과 예의라는 미묘한 경계에서

예의와 갑질이 한 끗 차이로 달라질 수 있을까.


8월 언제가 서울 본사로 출장 간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금요일이었고 여름휴가로 비워진 자리도 많았다. 공장에 바쁜 일도 없었다. 그 특유의 평화롭고 여유로움을 만끽하던 중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 팀장이 외출을 준비했다. "본사 출장온 김에 외부 업체와 미팅을 가지자"면서. 나 또한 별일 없던 참이라 따라나섰다.


예정된 미팅은 아니었다. 본사 일정은 이미 끝마쳤다. 잘 숨어 다니다 칼퇴하는 몇 없는 귀한 하루였다. 급한 업무라도 생긴 걸까 의아하던 참에 카페에 도착했다. 아주 더운 날이었다. 5분 거리 카페를 가는 동안에도 등에 땀이 났다.


익숙한 얼굴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시스템 솔루션 업체의 K영업 부장이었다. 당시 우리 회사는 1년짜리 시스템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었고 K부장네 회사는 유력한 후보였다. K영업 부장은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서 부지런했다. 몇 주전에도 지방에 위치한 우리 공장을 찾아 PT도 하고, Prototype도 만들어서 제공했으며, 그들 비용으로 외국 개발자를 초청해서 Q&A세션도 가졌다. 신규 업체였던 만큼 우리 회사 프로젝트가 간절했다.


어딘가 비굴함도 느껴지던 그의 친절은 회사의 그런 속 사정과도 연관 있었다. K영업 부장은 우리 팀장에게 친절했다. "했다"기 보단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우리 팀장은 PM으로 프로젝트를 리딩할 참이었다. 업체 최종 결정은 높으신 분들이 하겠지만 그 길목에선 팀장 입김이 중요했다. 그러니 팀장을 향한 K영업 부장의 친절은 개인적인 존경과 호감은 단연코 아니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갑과 을이라는 위치가 만들어 낸 친절 에너지였다.


노골적이지 않지만 우리 팀장은 그의 유리한 위치를 은은하게 즐겼다. 가령 미팅 중에 상대가 무안하리만큼 말을 자른 뒤에 본인 생각을 한참 떠들거나, 혹은 주문한 커피가 나와도 꿈쩍 안 해서 상대가 가져오방식, 또는 미팅을 본인 일정 위주로 잡는 따위의 방식으로. 그것은 아주 사소하고 정교해서 가까이서 관찰해야만 확인할 수 있는 종류의 무례함이었다.

 그들의 열과 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 회사는 최종 결정에서 경쟁 업체였던 대기업이 선택다. 큰 프로젝트를 맡기기엔 K부장네 회사는 규모가 너무 작다는 게 이유였다.


본사 출장을 간 그날은 그 결정과 통보가 있은지 일주일쯤 지 날이다.


오랜만에 본 K영업 부장은 잘 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부장이란 높은 직함 무색했다. 만약 둘 중 눈치를 봐야 한다면 그들을 떨어트린 우리가 눈치를 봐야 하는 게 맞을 텐데, 이 관계는 참 이상하다 싶다. 그도 나처럼 땀을 흘리던 참이었는데 그것이 8월의 더운 날씨 때문인지는 분간 어려웠다. 우리 둘에게 메뉴를 주문받고 으레 그래왔듯 K부장이 결제했다. 영업활동비 항목으로 사용하는 법인카드겠지. 속으론 "프로젝트 영업 활동도 끝났는데, 어떤 계정으로 커피 값을 정산할까?"란 지나친 걱정을 했다.


그 이후 미팅 자리에선 이렇다 할 얘기는 없었다. 당초 미팅엔 목적과 주제가 없었다. 말 그대로 무용했다. 이미 결정은 끝났다. 이 작은 카페에서 22억짜리 프로젝트의 결과가 뒤집힐 가능성은 없다. 팀장과 K영업 부장은 이런저런 영양가 없는 업계 소식과 사람들 근황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낭비했다. 약 삼십 분쯤 시간이 흐른 뒤 팀장은 부장에게 혹시 앞으로 신규 프로젝트를 하거나 타 업체에서 비슷한 일이 있다면 꼭 소개해주겠다며 본인만 믿으라고 호언장담하며 그를 카페에서 내보냈다.


가만히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나는 K부장이 가게를 나간 후 오늘 왜 미팅을 한 거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정에도 없었는데 급할 사안도 아니고, 내용도 없었으며, 의사결정이 필요한 안건도 하나 없었다. 게다가 K영업 부장 회사는 꽤 거리 있어서 영업맨 특유의 정장 복장으로 이 더위를 오고 가는 것에 어지간히 땀을 빼야 했을 거다.


팀장은 핸드폰 주식 애플리케이션에 시선을 그대로 둔 채...."우리랑 같이 안 하게 됐지만 이렇게 인사하는 게 예의다"라고 답했다.


지난 3년 동안 그를 아주 가깝게 지켜봐 온 나는 사실을 안다. 팀장은 단지 콧바람 쐬러 나갈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고 그것이 K영업 부장을 이 더운 날 여기까지 호출한 이유란 걸. 그 내용 없는 미팅을 마치고 한참 뒤에야 회사로 복귀한 그의 후속 행동이 내 가설을 확신으로 바꿨다. 그는 면대면으로 예의를 지킨다는 대의명분으로 그의 작고 소소한 갑질을 둔갑했다. 입 밖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최소한 속으로는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덩달아 나온 콧바람 외출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업무 시간에 커피 마시러 나오고, 업체 미팅이란 적당한 명분도 있었다. 팀장도 함께다. 문책할 사람이 공범인 호재는 드물다. 회사로 복귀할 때가 돼서 카페 밖을 나서자 축축하고 후덥지근한 8월의 더위가 몸을 덮쳤다. 그러자 나는 갑자기 한 시간 전 이 더위를 먼저 맞았을 K영업 부장이 생각나 조금은 발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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