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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현 Sep 06. 2019

나는 그 공연을 보이콧합니다.

배우를 선택할 관객의 권리

여러 번 언급했듯, 필자의 '최애극'은 뮤지컬 〈헤드윅〉이다. 극이 가지고 있는 젠더적 의미를 포함하여, 극의 전개 방식, 버릴 것 하나 없는 최고의 넘버, 그리고 주인공인 헤드윅과 이츠학을 맡은 배우들에 따라 천의 얼굴같이 변하는 공연의 느낌은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다행인 것은, 〈헤드윅〉이 공연 시장 내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라고 쓰고 티켓이 잘 팔리는 편이라서,라고 읽는다) 일 년에 한 번 꼴로 올라오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에 따라 내 통장은 비어 가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올라온 〈헤드윅〉은 이전 시즌에 비해 과거의 유수한 캐스팅이 많이 돌아오지는 않았으나, 전동석, 윤소호, 홍서영 배우에 이어 최근 합류한 이규형 배우까지 새로운 헤드윅과 이츠학을 발굴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시즌이다. 그 와중에 역대급 헤드윅 중 한 명인 오만석 배우가 지난 시즌에 이어 재차 캐스팅된 것을 보고, 얼마 전 홍익대학교 대학로아트센터에 다녀왔다. 그날의 헤드윅은 대단히 설득력이 높았다. 역시, 좋다.


2019 뮤지컬 〈헤드윅〉 캐스팅 (ⓒ 쇼노트)


하지만 티 없이 맑은 헤드윅에 새카만 얼룩을 묻힐 뻔 한 사건이 이번 시즌에 발생했으니, 바로 사생활 논란으로 인한 강타의 하차였다. 이로 인해 초기 캐스팅인 오만석, 강타, 정문성, 전동석, 윤소호 헤드윅에서 강타가 빠져나가고, 예정에 없었던 마이클 리의 원어 무대에 이어 이규형 배우가 합류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캐스팅으로 보았을 때 '뮤지컬 팬'으로서는 보다 기대되는 캐스팅으로 변모하였으나, 헤드윅을 사랑하는 한 관객으로서는 그 히스토리를 생각해보면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연을 보이콧하는 관객들


사생활, 혹은 법적 문제를 일으켜 공연에서 하차한 배우는 적지 않다. 가장 가깝게는 사생활 논란으로 뮤지컬 〈메피스토〉에서 하차한 가수 남태현이 있었고, 무면허 음주운전 사고로 최근 실형을 받은 뮤지컬 배우 손승원 또한 이슈가 생기자 당시 공연하던 뮤지컬 〈랭보〉에서 하차했다. 하지만 공연 애호가들에게 가장 큰 충격과 반향을 주었던 사건은 2016년에 있었던 가수 이수(본명 전광철)의 〈모차르트!〉사태였다.


2016년 〈모차르트!〉 이수 캐스팅 당시 티저 이미지와 하차 서명운동 트윗


당시 뮤지컬 팬들의 저항은 강했다. 공익근무요원 복무 중 미성년자 성매매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이수가 뮤지컬 〈모차르트!〉에 주인공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역으로 캐스팅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연극/뮤지컬 팬들은 이른바 '덕 집합소'인 디시인사이드 연극뮤지컬 갤러리를 중심으로 제작사인 EMK뮤지컬컴퍼니에 항의하는 한 편, 하차 촉진을 위한 서명과 모금을 진행했고 공연 자체를 보이콧하려는 움직임까지 나타났다.


모 관객은 하차 운동을 위한 광고 모금에 일천만 원을 쾌척해 이슈가 되었고, 일부 관객들은 뮤지컬 원작자에게까지 해당 내용을 항의하는 등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표명하며 보이콧을 이어나갔다. 결국 제작사는 이수의 하차를 선언하고 캐스팅과 관련된 이슈에 대해 사과하며 해당 내용은 막을 내렸다.


작년 공연계 미투 운동 당시 관객들의 'With you' 일러스트

이후, 2018년 공연계 미투 사건이 터졌을 때도 관객들은 수많은 배우와 공연을 보이콧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 연극/뮤지컬 팬들은 미투에 실질적으로 연루된 배우와 극단, 공연을 대단히 객관적 시선으로 분류해 공유했고 해당 집단 및 개인에 대한 보이콧을 불사하며 '공연계를 지키려' 애썼다.


공연계 관객들은 왜 이토록 적극적이고 강력하게 대응하는 걸까? 특정 배우의 캐스팅이 문제가 되는 것이라면 그 회차를 제외하고 공연을 관람하면 안 되는 걸까? 그들은 그 보이콧을 통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지키고 싶은 걸까? 그들의 작은 외침은 과연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꾸고 있을까?




그들이 지키고 싶은 '기본'


뮤지컬 〈헤드윅〉은 배우로서도, 관객으로서도 몰입이 매우 중요한 극이다. (ⓒ쇼노트)


공연은 기본적으로 몰입의 예술이다. 공연을 보다 보면 가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때가 있는데, 배우의 몰입과 관객의 몰입이 만나는 지점에서 배우와 관객이 사라지는 것이다. 배우는 더 이상 배우가 아니라 극 중 인물로 무대에 존재하게 되고, 관객은 내가 공연을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다. 실제로 몰입과 감정이입이 강해지면 그런 상태가 된다.


이런 몰입이 이루어지면 극 중 인물들의 감정과 극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굉장히 명확하게 느낄 수 있다. 소설가 김영하는 소설을 읽는 이유에 대해 '타인의 삶을 살아보는 경험'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그 지점과 맞물려있다고 할 수 있겠다.


뮤지컬 〈모차르트!〉 속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연출적으로 자신의 과거인 아역배우와 함께 연기한다. (ⓒEMK뮤지컬컴퍼니)


그런 관점에서 캐스팅된 배우 개인의 정체성은 관객들에게 매우 중요한 몰입의 잣대가 된다. 단순한 예능 프로그램들과 달리 서사와 개연성이 중요한 극, 영화, 드라마의 경우 배우가 지금까지 보여온 모습들이 극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수 사태'에서 관객들이 지적한 명확한 포인트 역시 거기에 있었다. 〈모차르트!〉는 극의 연출 상 무대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형상화하는 아역배우와의 연기 장면이 필수적인데, 미성년자 성매매를 저지른 배우가 해당 연기를 하게 되었을 때의 미스매치와, 아역배우가 받을 상처에 대해 고려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수가 〈모차르트!〉 다음으로 하고 싶다고 언급한 극이 바로 〈헤드윅〉이었다는 인터뷰가 그 불씨를 키웠다.


ⓒ쇼노트

극 중 트랜스젠더 가수로 등장하는 헤드윅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받았던 성적 학대로 인해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인물이다. 헤드윅 내면의 젠더적 갈등이 전체적인 극의 진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그 아픔과 해소가 극의 중심 정서이기에 〈헤드윅〉을 '넘버가 아름답고 시나리오가 드라마틱해서'라는 이유로 입에 올린 것은 무지의 소치로 볼 수밖에 없었다. 〈헤드윅〉과 함께 하고 싶다고 말했던 극이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였다는 것에서 파생되는 문제점들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원하는 배역은 높은 확률로 '지저스'였을 텐데, 성범죄를 저지른 예수라니. 상상은 여러분에게 맡기겠다.



무대에 주홍글씨를 남기지 말라


필자는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무대예술이 고정된 모습이 아니라, 배우와 연출의 변동에 따라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가변적 예술이라는 점도 관객들의 보이콧 문화에 관여한다고 생각한다. 공연 팬들은 단순히 특정 배우나 뮤지컬 넘버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공연 자체'를 소비한다. 이전의 글인 그 남자가 회전문을 도는 이유에서도 설명했지만 매 회, 매 시즌 공연의 모습은 다른데, 배우가 달라지고 연출이 변함에도 관객이 해당 콘텐츠를 같은 콘텐츠로 인식하고 소비한다는 점에서 이는 일종의 '상징 소비'에 가깝다.


〈빌리 엘리어트 뮤지컬 라이브〉의 커튼콜 장면. 역대 '빌리'들이 모두 등장한다 (ⓒ 빌리엘리어트뮤지컬라이브)


사진은 2014년 영국 웨스트앤드의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스크린으로 옮겼던 〈빌리 엘리어트 뮤지컬 라이브〉의 커튼콜 장면이다. 맨 오른쪽에 서 있는 네 명의 소년이 해당 시즌의 '빌리'이며, 왼쪽으로 주욱 늘어선 20명이 넘는 청년들이 지금까지 〈빌리 엘리어트〉 무대에 섰던 '빌리'들이다. 이른바 '빌덕'들이 이 무대에 감동했던 이유는 스스로가 상징적으로 소비하고 향유해왔던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역사를 한 무대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빌리 엘리어트〉라는 공연은 특정 시즌과 그 시즌 배우들을 매칭 시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빌리 엘리어트〉 그 자체로 인식된다. 때문에 자신이 사랑하는 공연에 문제의 소지가 있는 배우, 혹은 관계자가 개입하는 것이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로 남을 수 있다. 때문에 '문제가 있는 배우가 나오면, 그 회차를 안 보면 되잖아?'라는 질문은 적어도 공연계에서는 설득력이 없다.


그들이 아니더라도 무대에 서고 싶은 실력있는 배우들은 많다. 사진은 최근 트라이아웃 공연을 한 우란문화재단의 〈앙상블〉(ⓒ우란문화재단)


또한 다양한 문제의 소지를 지닌 배우들이 자숙 후 점진적 복귀를 빌미로 무대를 찾는 것 또한 뮤지컬 팬으로서 달가운 일은 아니다. 방송으로 복귀를 할 경우, 전방위적 노출로 인해 때 이른 복귀가 아니냐는 역풍을 맞을 것이 두려운 배우들이 상대적으로 제약이 덜한 뮤지컬이나 연극으로 복귀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것이 일종의 복귀 공식과 같이 정립되었던 것이다.


공연을 이미지 세탁 방법으로 활용하는 것도 반갑지 않은 일인데, 이렇게 복귀한 대다수의 배우들이 무대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준의 모습들을 보이면서 점점 이런 루트에 대한 시각들이 부정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결국 기본적으로는 인성과 태도, 두 번째로는 실력의 문제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알돈자 (ⓒ이데일리)

이런 보이콧은 어떤 결과를 남겼을까. 많은 사람들이 뮤지컬 관객들을 유별나다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이들의 적극적 노력이 바꾼 모습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공연계 관습에 기본적인 도덕성과 젠더 감수성이 녹아들고 있다는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배우나 연출을 실력이나 경력으로 포장하여 소비하는 것을 경계하는 제작사들이 나타났다.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공연계가 이른바 '예술 권력'이 작용하는 장이라는 점에서 쉬쉬해왔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관객들이 보인 적극적인 모습은 이 문제의식을 다시금 들춰내는 데 기여했고, 그렇게 변화하는 인식은 공연계가 스스로 자정활동을 하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또한 작년 공연계 미투 운동의 흐름 이후로 스토리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시대적 흐름에 맞지 않는 장면이나 캐릭터의 성격을 바꾸는 작업들도 계속되고 있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매 시즌마다 논란이 되었던 알돈자의 겁탈 장면을 상징적인 장면 연출로 대체해냈고, 뮤지컬 〈삼총사〉는 여자를 좋아하는 마초 캐릭터였던 포르토스를 우악스러움 안에 연약함이 감춰진 남성 캐릭터로 변화시켰다.


이를 단순히 작년에 있었던 미투 운동의 여파로 보아서는 안 된다. 작년의 사태는 실제 공연계에 뿌리 깊게 박혀 있던 젠더폭력이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공연에 드러나는 캐릭터성과 시대상에 의한 폭력은 젠더성을 포괄하는 더 넓은 범위의 이야기다. 특정 시대의 전형성이 현시대에 와서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고 불편함을 준다면, 해당 부분은 극의 흐름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시대에 맞게 수정되어야 한다. 알돈자의 절망을 보여주기 위해 그녀가 유린당하는 내용이 필요하고, 삼총사의 영웅적인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해적 포르토스의 마초적인 모습이 필요하다면 현시대의 기준에 맞게 연출하여 전달하면 될 일이다.


공연계가 좀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쓰는 〈어쩌면 해피엔딩〉  (ⓒ대명문화공장)


공연계에 확산되는 도덕성과 젠더 감수성에 동의한다. 예술은 일상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기에, 일상에서 지친 마음과 그곳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다. 타인의 삶을 바라본다는 것, 나와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는 경험은 지금의 내 삶을 돌아볼 수 있게 해 주고, 그 과정에서 위안을 준다.


그런 만큼 예술이 또 다른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 부디 예술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저지르게 되지 않기를, 관객들이 더 이상 공연을 보이콧하게 되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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