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자현 Feb 06. 2020

우리는 모두 외톨이다.

연극이 주는 소소한 위로, 연극 〈외톨이들〉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필자는 대학로 소극장 공연들을 좋아한다. 돈이 없던 대학 시절에 대극장 뮤지컬을 본다는 것은 연례행사 같은 일이었다. 대극장 공연을 한 번 보면 그 달 내내 천국에서 파는 김밥 한 줄로 점심을 때워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소극장 공연을 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하지만 그렇게 작은 공연장에서 어깨를 맞대고 공연을 보며, 소소한 공연이 주는 사소한 위로에 감동하게 된 적이 제법 많았다. 소극장 공연이 위로를 주는 이유는 배우들과의 거리가 가까워 높은 몰입감을 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많은 소극장 공연들이 말 그대로 '소소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 극단 명작옥수수밭 페이스북


대극장 공연들이 위대한 고전이나 환상적인 판타지, 스펙터클한 액션을 보여주는 반면, 소극장 공연들은 '이게 이야기가 될까'싶은 주제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이야기들은 우리 주변의 흔하디 흔한 이야기들이다.


이번에 보고 온 연극 〈외톨이들〉이 바로 그랬다. '아니, 뭘 이런 걸 공연으로까지 만드나'싶은 작품. 등장인물은 유튜브를 찍어 스타가 되고 싶은 두 학생, 그중 한 명을 좋아하는 또 다른 학생, 외모 문제로 고민하는 다른 학생 두 명과 경비 아저씨, 노숙자, 그리고 평범한 아저씨 한 명이다. 게다가 배경은 극 내내 작은 아파트 단지 하나를 벗어나지 않는다.


별다른 갈등이나 사건도 없다. 평범한 아저씨가 알고 보니 괴상망측한 이중인격자였다던가, 착한 줄 알았던 경비아저씨가 알고 보니 사람들을 죽여 그 고기로 파이를 만드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흥미로워하거나 재밌어할 구석이라고는 거의 없는 셈이다.


연극 〈외톨이들〉 포스터 (ⓒ 극단 명작옥수수밭 페이스북)

그렇게 극은 흘러간다. 지극히도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들이 그렇듯 이 등장인물들도 알고 보면 하나씩 자기만의 이야기, 자기만의 상처 하나씩을 들고 있다. 유튜브를 찍는 학생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살고 있고, 그걸 찍어주는 학생은 그 집에 얹혀 산다. 그 학생을 좋아하는 남학생은 사회성이 떨어지고 말이 없다. 외모로 고민하는 두 학생은 실직한 부모님을 대신해 빵을 굽는다. 경비 아저씨는 알고 보면 젊은 나이에 아버지를 대신해 일하고 있고, 노숙자 아저씨는 그 경비아저씨에게 늘 쫓겨다닌다. 그리고, 평범한 아저씨는 알고 보면 그다지 평범하지 않은 인물이다.


해체된 가족, 불우한 상황들, 이룰 수 없는 꿈, 애정의 결핍이 어우러진 이 평범하지 않은 상황과 모습을 통해 극은 우리 모두가 외로운 구석이 하나쯤은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인스타그램에서, 유튜브 방송에서는 행복하고 밝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알고 보면 자기만의 외로움을 지고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포스터 제일 위에 쓰여 있는 문장, "그거 몰랐어요? 우린 모두 외로워요!"라는 말이 무대를 보며 점점 실감된다.


2018 종로문화다양성연극제 당시 〈외톨이들〉 공연장면(ⓒ한국문화예술위원회 블로그)


제목이 주는 느낌마저 도저히 밝지 않을 것 같은 이 작품은 역설적으로 비현실적으로 밝다. 분명 배우들은 성인일 텐데도 우리 집 옆 고등학교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자연스러운 급식체와 시의적절한 유머 코드, 그리고 비현실적이고 과장된 상황 연출은 무거운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전달한다.


다양한 외로움의 얼굴을 통해 극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모습은 결국 외톨이인 우리네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다. '외톨이'의 '외톨'을 사전에서 검색해보면 '밤송이나 통마늘 따위에 하나만이 여물어 들어 있는 알'이라는 뜻이 나온다. 말 그대로 한 송이 안에 여러 톨이 있어야 하는데, 한 톨만 들어있는 것이다. 하지만 밤나무에는 무수한 밤송이들이 있다. 외톨인 송이 옆에는 또 다른 외톨이, 그 옆에 알이 꽉 찬 송이가 모이고 모여 밤나무를 이룬다. 우리네 삶도 그렇다.


ⓒ 극단 명작옥수수밭 페이스북


처음에는 너무나 평범한 우리 주변 이야기로 보였지만, 모두가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는 이 극에 관객이 몰입할 수 있는 이유는 극 속에 있는 어느 한 외로움쯤은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도 있을 수 있는 그 작은 외로움을 무대 위의 인물들에게서 찾고 같이 마음 아파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뻔하디 뻔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무대를 보며 나도 모르게 위로를 받는다.


극 중 기쁨의 아빠이면서 동성애자인 장현은 '낚싯바늘 없는 새우깡'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낚싯바늘도 없이 새우깡을 묶어 아파트 연못에 던지는 아버지에게 장현이 묻자, 아버지(기쁨의 할아버지)는 '얘들도 이런 거 하나는 있어야지'라고 답한다. 모두가 외롭고 사나운 세상에 하나의 위로, 그것이 물고기들에게는 '낚싯바늘 없는 새우깡'인 것이다.


ⓒ 극단 명작옥수수밭 페이스북


필자에게는 이 공연이 '낚싯바늘 없는 새우깡' 같았다. 어떤 의도도, 계산도 없이 우리 삶의 한 면을 그대로 보여주며, 있는 그대로 다가오는 무대과 배우들. 그리고 거기서 오는 따뜻함.


그리고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낚싯바늘 없는 새우깡'이 될 수 있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조선에도 스웩(Swag)이 있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