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자현 Mar 03. 2020

내 죽음을 기억하시나요?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을까

최초로 누군가를 용서해본 기억을 떠올려본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인생 최초의 용서는 분명히 친구와 다투거나, 형과 다투었을 때일 테다. 선생님, 혹은 부모님의 '자, 너희 이제 손잡고 서로 미안하다고 말해'라는 말에 마음에도 없는 '용서'를 해 보았을 것이다. 그것이 진실된 용서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억에 깊게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용서하지 못한 일들이 더 많이 떠오른다. 학창 시절에 나를 이간질했던 친구는 스무 살이 넘어서 술자리를 빌어 나에게 사과를 했었다. 나는 삼 년도 더 지난 일을 꺼내서 무엇하냐고 얼버부렸고, 그 자리는 그렇게 지나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실은 나는 그 친구를 용서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힘들었던 만큼 그 친구의 마음속에 짐을 지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 두산아트랩


이렇게 작은 일조차 용서하고 싶지 않은데, 너무나도 큰 잘못을 완전히 용서하고 서로 친구가 된 사람들이 있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가족을 죽이고, 13살의 피해자마저 죽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살아남았고, 끝끝내 그를 용서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 EBS 다큐프라임 '제노사이드, 학살의 기억들'


르완다에서는 수십 년 간 소수파 지배계급 투치족과 다수파 피지배계급 후투족의 내전이 있었다. 그리고 1994년 여름부터 불과 100여 일 사이에 백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이는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고, 우리는 이것을 '르완다 대학살(Rwanda Genocid)'이라고 부른다.


이 학살의 중심에 한 사람, '느탐바라 장 끌로드'가 있었다. 그는 후투족 무장조직인 '인터라함웨'의 일원이었고, 대학살의 소용돌이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리고, 그의 총칼에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 중 이 글의 중심인물이 된 피해자 '끌로뎃 무카루만지'가 등장한다.


ⓒ EBS 다큐프라임 '제노사이드, 학살의 기억들'


느탐바라는 당시 13살이던 무카루만지를 칼로 찔렀다. 죽었다고 생각한 그녀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내전이 끝난 이후, 살인죄로 복역을 마친 느탐바라를 다시 만난다. 느탐바라는 그녀에게 한 번이고, 두 번이고 용서를 구한다. 그가 일곱 번째로 아내와 함께 그녀를 찾아가던 날, 그녀는 그를 용서한다.


추태영 연출의 연극 〈내 죽음을 기억하시나요〉는 이 지점에서 관객들을 만난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한 한 사람. 그리고 그 용서의 기억을 남기기 위해 다큐멘터리 작가가 기록한 400페이지가 넘는 녹취록. 그 속에서 용서의 의미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 두산아트랩


극은 대단히 새로운 형식을 띤다. 좋게 말하면 신선하고 다채로우며, 조금 나쁘게 말하면 '이게 무슨 연극이야?'싶은 느낌이 든다. 일반적인 연극이라면 르완다 대학살의 장면을 재연하고, 그 속에서 대사와 연기를 통해 상황을 설명하며 관객들을 설득해 나가겠지만, 이 극은 조금 다르다.


이 극에서 배우들은 녹취록을 직접 읽는 화자이자, 무카루만지의 용서에 대해 고민하는 배우 모임의 일원이자,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그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자 하는 한 개인이다. 극이 녹취록의 낭독과,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토의, 배우 개개인의 용서에 대한 고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형식 속에서 관객들은 각자 자신들의 이름으로 무대 위에 함께 존재하며, 영상과 배우들의 목소리를 통해 용서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 두산아트랩


또 극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극이 전환되는 시점마다 연출의 목소리가 가미된다. 연출 역시 자신이 겪었던 용서의 경험을 연출 스스로 고백함으로써, 용서에 대한 고민을 최초에 시작했던 한 사람으로 고백의 무게를 더한다.


무카루만지의 고백과 느탐바라의 고백, 배우 개개인의 고백과 연출의 고백까지 더해져 극은 70분 내내 다양한 목소리의 고백으로 뒤덮인다. 관객들은 이 고백 속에서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극 속의 경험들을 일치시키게 된다. 하지만 글의 시작점에 필자가 그렇듯, 배우들도, 연출도 무카루만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가진 너무나도 작고 개인적인 문제도 용서하지 못하는데, 저 용서가 과연 진실된 용서일 수 있을까?

ⓒ EBS 다큐프라임 '제노사이드, 학살의 기억들'


그러나 무카루만지는 느탐바라를 진심으로 용서한다. 그리고 아마도 극의 메시지가 될 한 마디를 남긴다. 느탐바라가 자신의 집에 일곱 번이나 찾아와서 진심 어린 용서를 구했을 때, 자신은 '더 이상 나의 삶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를 용서하였다'고. 또 다른 피해자의 목소리도 말한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중요하다'고.


각자의 마음을 털어놓던 배우들도,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던 연출도 각자에게 주어졌던 용서의 경험 속에서 그 상처를 담아두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음을 고백한다. 가해자가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을 때, 혹은 가해자와의 소통이 단절되었을 때도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 상처를 놓는다.




ⓒ 두산아트랩


'르완다 대학살'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용서'라는 주제를 꺼내어, 관객들로 하여금 다양한 목소리로 용서에 대해 고민하게 한 극의 주제와 형태는 신선했다. 두산아트랩 공연이 젊은 예술가들의 창작과 실험을 지원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주제를 배우들과 연출의 목소리를 통해 말함으로써 관객들의 몰입을 이끌어 낸 시도에 박수를 보낸다.


다만, 최초 주제의식이 된 르완다의 이야기와 400페이지에 달하는 녹취록의 내용들이 배우들의 목소리에 묻히는 것 같아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용서'가 이해되려면 더 많은 무카루만지의 목소리와 느탐바라의 사죄가 동반되어야 할 것 같다. 또 배우들의 연령대를 조금 더 다양화해 단순히 가족사를 벗어난 다양한 용서의 경험들을 보여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남는다.


ⓒ 두산아트랩


상처의 얼굴은 하나지만, 용서의 얼굴은 다양할 것이다. 극은 일종의 열린 결말로 끝나지만, 무카루만지의 용서에 대해 충분한 이해와 공감이 수반되지 않으면 극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오인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카루만지의 용서 역시 용서의 다양한 얼굴 중 한 면이지, '용서'의 절대적 얼굴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용서에 대한 언급조차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극은 철저히 '무카루만지의 용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말한다. 시대에 의해, 역사에 의해, 집단에 의해 자신들이 저지르는 일이 악이라고 생각지도 못한 채 저지르는 수많은 잘못들. 하지만 그 잘못들은 모두 상처를 남긴다. '악의 평범성'을 변명으로 과오를 덮으려는 가해자들에게 필수적으로 동봉되어야 하는 것은 진심 어린 사과와 눈물이다.


ⓒ EBS 다큐프라임 '제노사이드, 학살의 기억들'


결국 무카루만지를 용서의 길로 이끈 것 역시 느탐바라의 일곱 번의 사과와 그 스스로의 삶에 대한 의지가 아니었을까. 그녀의 마음속에 어떤 싹이 텄기에 그런 꽃을 피울 수 있었을지, 다음 공연에서 볼 수 있기를 관객의 한 사람으로 간절히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모두 외톨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