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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현 Feb 01. 2019

지킬앤하이드는 한국 뮤지컬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는 〈지킬 앤 하이드〉, 우리가 모르는 〈지킬 앤 하이드〉

세계 4대 뮤지컬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은 학창 시절 달달 외웠던 기억이 있다.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다. 항상 '로미오와 줄리엣'을 넣어야 하나, 빼야 하나 고민했다. 그들은 결국 사랑 때문에 다 죽었는데. 그러면 비극 아닌가? 하고 생각하다가 고민 끝에 빼고는 기억나지 않는 하나의 비극을 생각해내려 애쓰곤 했다. 무언가를 선별하여 규정하는 일은 이렇게 사람들로 하여금 그 대상을 쉽게 기억에 남게 한다.


세계 4대 뮤지컬은 영미권에서 부르던 '뮤지컬 빅4'를 잘못 해석해 나온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기억에는 '세계 4대 뮤지컬'이 더 강렬하게 박히게 되고, 우리는 그렇게 그 작품들을 기억하게 된다. 세계 4대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레 미제라블〉, 〈미스 사이공〉 그리고 〈캣츠〉를 말이다. 그렇다면 '한국 4대 뮤지컬'을 뽑으면 어떻게 될까? 단순히 창작으로 범위를 한정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은 작품들로 선정한다면 어떨까. 사람마다 의견은 다르겠지만 나는 〈지킬 앤 하이드〉가 반드시 들어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뮤지컬 애호가들이 아닌 일반 대중들이 기억하는, 혹은 한 번이라도 보았던 뮤지컬을 뽑는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킬 앤 하이드〉는 샤롯데씨어터나 블루스퀘어 같이 웅장하고 멋진 공연장에서만 막을 올림에도, 올라올 때마다 무시무시한 객석 점유율을 기록하는 극이니 말이다. 런데 〈지킬 앤 하이드〉에 대한 이런 인식과 현상은 조금, 이상하다.




〈지킬 앤 하이드〉는 어떻게 사랑받는 뮤지컬이 되었나?


`19년 1월 현재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가 공연되고 있는 샤롯데씨어터 (ⓒ샤롯데씨어터)


일주일 전, 〈지킬 앤 하이드〉를 보러 샤롯데씨어터에 다녀왔다. 이상하게도 샤롯데씨어터와는 연이 잘 닿지 않아 고작 세 번째 방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롯데씨어터가 좋은 이유는 잠실역에서 샤롯데씨어터까지 이어지는 길이 좋은 시퀀스(Sequence)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펼쳐지는 홀과 롯데호텔을 끼고 걷는 길이 좋은 인상을 주어서 샤롯데씨어터에 가는 길은 기분이 좋다.


로비와 티켓부스에는 공연 한 시간 전부터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티켓을 받아 근처 커피숍에 자리를 잡고 함께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과 담소를 나눴다. 그때, 테이블 옆으로 낯익은 사람이 한 명 지나갔다. 배우 배두나였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비밀의 숲〉에서 그는 조승우 배우와 호흡을 맞췄다. 해당 회차가 조승우 배우가 출연하는 무대였으니 아마 초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공연장에 왔다가 다른 배우나 가수를 보게 되는 경험은 나름대로 신선한 감동을 준다.


객석 입장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극장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포토존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고, 캐스팅보드 앞에는 가로세로 균형을 맞춰 캐스팅을 렌즈에 담으려는 또 하나의 줄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이토록 뮤지컬의 상징과도 같이 여겨지는 〈지킬 앤 하이드〉는 놀랍게도 '한국에서만' 성공한 뮤지컬이다.


2017년 월드투어 공연 당시 서울 블루스퀘어에서 공연된 〈지킬 앤 하이드〉(ⓒ 오디컴퍼니)


〈지킬 앤 하이드〉는 1997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첫 막을 올렸지만, 흥행 성적이 좋지 않았다. 총 4년간의 공연에서 150만 달러의 적자를 보았고, 수많은 공연들이 독자적인 극장을 확보하여 오픈런으로 공연을 이어가는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앤드에서 결국 살아남지 못했다. 정식 공연은 4년 만에 막을 내렸고 그 이후로는 종종 투어 공연이 이어졌을 뿐 본고장인 미국이나 영미권에서는 사랑받지 못했던 것이다.


흥행하지 못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원작인 소설의 내용을 뮤지컬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소설이 가지고 있던 디테일들이 탈거되고 로맨스적 요소가 들어오며 원작 애호가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고, 지킬의 캐릭터와 스토리의 흐름이 고전작품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지극히 '평면적'이라는 점에서 매력을 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2013년 브로드웨이 리바이벌 공연이 무대에 올랐으나, 예정되어 있던 3개월도 다 채우지 못하고 막을 내렸고 일본, 독일, 영국, 헝가리 등에서도 공연되었으나 크게 사랑받지는 못했다.


2018-2019 시즌 〈지킬 앤 하이드〉 2막 오프닝 곡인 '살인, 살인(Murder, Murder)'의 한 장면 (ⓒ오디컴퍼니)


반면 한국은 어땠을까? 〈지킬 앤 하이드〉가 국내 무대에 처음 오른 것은 오디컴퍼니의 주도로 코엑스에서 막을 올린 2004년이었다. 이후 전 세계 뮤지컬계를 통틀어서 보아도 이례적사랑받으며 지속적으로 무대에 올랐고, 2017년 월드투어를 제외하고 국내 배우들로 오른 공연만 이번이 9번째 시즌이다. 누적 공연 회차는 1,100여 회, 매 회차 유료 객석 점유율 95%를 기록하며 대장정을 이어온 〈지킬 앤 하이드〉의 국내 누적 관객 수는 무려, 120만 명이다. 이번 2018-2019년 9번째 시즌 역시 조승우, 홍광호, 박은태에 이어 전동석, 민우혁이라는 걸출한 배우들을 기용하며 피 튀기는 티켓팅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


어째서 전 세계적으로 흥행하지 못했던 공연이 유독 한국에서만 사랑받는 것일까?




오디컴퍼니의 신의 한 수, 논 레플리카(Non-replica)


〈지킬 앤 하이드〉가 국내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데 있어서는 오디뮤지컬컴퍼니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신춘수 프로듀서는 이 공연을 국내에 들여오며 '논 레플리카(Non-replica)' 제작방식을 고수했다. '논 레플리카'는 무대, 안무, 의상, 연출을 기존의 오리지널 공연과 똑같이 적용한 채 배우들만 현지화되는 '레플리카' 공연과 달리, 원작에 수정, 각색, 번안을 가능케 함으로써 기존 〈지킬 앤 하이드〉를 오디컴퍼니의 색깔, 한국적 색깔에 맞게 변형해냈다.


덕분에 한국형 〈지킬 앤 하이드〉는 지킬을 젊고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인물로 재탄생시킬 수 있었고, 기존 브로드웨이 버전에서 '평면적'이라며 비판받던 캐릭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설득력을 만들어냈다. 일본의 경우 01년 초연에는 1950년생 뮤지컬 배우인 카가 타게시가, 12년 공연에는 1965년생 뮤지컬 배우인 이시마루 칸지가 지킬/하이드 역으로 무대에 올랐는데, 캐릭터가 주는 느낌이 얼마나 달랐을지 짐작할 수 있겠다. 국내 초연에서 조승우 배우와 함께 지킬로 무대에 선 류정한 배우가 뮤지컬계에서 '어르신'으로 불림에도 1971년생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무려 이번에 합류하는 전동석 배우는 1988년생인데 말이다.


오필영 무대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지킬의 연구실 세트. '지금 이 순간'에서 처음 등장한다. (ⓒ 더뮤지컬)


개인적으로 논 레플리카의 가장 큰 수혜를 본 것은 한국 〈지킬 앤 하이드〉의 '무대'가 아닐까 한다. 특히 2009년 내한공연 무대를 디자인했던 오필영 무대 디자이너가 2017년 월드투어 공연에서 새로 디자인한 현재의 〈지킬 앤 하이드〉 무대는 이전의 영미권 버전이나 기존 한국 시즌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스케일과 압박감을 선사한다. 


위 이미지에서 볼 수 있듯이, 압권은 '지금 이 순간(This is the moment)' 넘버에서 분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처음 등장하는 지킬의 연구실이다. 각각 선반에 매립된 전구들에 찬란하게 빛이 들어오며 넘버에 맞춰 네 개의 거대한 연구실이 밀려들어오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또한 색색의 약물들이 조명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연출함으로써 이후에 활용될 'Alive!'나 'First Transformation'에서는 또 다른 색감과 느낌을 주기도 한다. 샤롯데씨어터가 작은 공연장이 아님에도, 한국 〈지킬 앤 하이드〉의 무대는 아쉬울 것 없는 화려함과 무게감을 전달한다.



정상급 배우들의 향연, 그리고 조승우


논란의 여지가 없는 대한민국의 정상급 배우들. 이 배우들을 한 공연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 오디컴퍼니)


〈지킬 앤 하이드〉의 캐스팅은 늘 뮤지컬 팬들을 숨 막히게 한다. 2018-2019 시즌에서는 조승우와 홍광호, 박은태가 지킬/하이드 역에 캐스팅됨으로써 다시금 기대감을 끌어올렸다. 조승우 배우와 홍광호 배우가 함께 캐스팅된 것은 2010-2011 시즌 이후로 8년 만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칼 같은 고음을 장착한 박은태 배우의 지킬이 합류하고, 3월에는 홍광호 배우가 빠져나감과 동시에 전동석 배우와 민우혁 배우가 영광스러운 첫공을 올리게 된다. 이 어찌 감탄스럽지 않을 수 있으랴!


지킬/하이드 역에 누가 캐스팅되는지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지킬과 하이드, 두 인격을 연기하는 것이 몹시 어렵기 때문이다. 차라리 1인 2역으로 한 극 속에 두 인물로 등장하는 것은 막과 막 사이 간격이나 의상, 소품 등을 써서 표현할 수 있지만, 지킬과 하이드는 한 몸속의 두 인격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관객들이 시선이 집중된 무대 한가운데서 혼자 온전히 그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그 부담은 바로 2막의 'Confrontation' 넘버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오롯이 조명의 변화 하나에 의지해서 지킬과 하이드의 대립을 표현해야 하므로, 자칫 연기력이나 표현력, 노래가 부족하면 이 장면은 더없이 부끄러운 콩트가 되고 만다.


필자가 속해있는 아마추어 뮤지컬 극단에서도 워크숍과 장면 발표 등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욕심을 내어 'Confrontation'에 도전했지만, 넘버가 끝날 때까지 진지하게 자리에 남아 있던 관객은 없었다. 부끄러움은 보는 이의 몫이니까.


절대적인 지킬과 하이드, 조승우 배우 (ⓒ오디컴퍼니)

그리고 〈지킬 앤 하이드〉에 이런 '넘사벽'을 쌓은 배우도 조승우요, 그 벽을 깨부순 배우도 바로 조승우다. 조승우의 지킬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여기에 이견이 없을 거라 확신한다. 지킬의 캐릭터는 대단히 몽상가적이면서도 고집이 세 관객들이 몰입하기 쉽지 않은데, 조승우의 연기는 그 모든 장벽을 허물고 지킬의 감정에 관객들을 공감시킨다. 하물며 조승우의 연기를 보고 있자면 '절대악'인 하이드조차 슬프게 느껴지며 '쟤도 뭔가 사연이 있을 거야'하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니, 다른 작품에서도 전설적이지만 〈지킬 앤 하이드〉에 있어 조승우의 가치는 말 그대로 '언터쳐블(Untouchable)'이다.


초연 당시, 연기에 대한 입소문만으로 흥행을 만들어 내고, 결국 그 해 한국뮤지컬대상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며 신화를 써 내려가기  시작한 조승우는 이번 시즌에도 건재하다. 아니, 오히려 더 설득력 있고 더 깊다.


그동안 지킬/하이드 역을 거쳐 간 배우의 이름만 보아도 류정한, 조승우, 홍광호, 민영기, 김우형, 박은태 등 어느 극의 어느 배역으로 세워도 아쉽지 않을 배우들이니, 결국 한국이 사랑하는 뮤지컬 배우들이 한국이 사랑하는 〈지킬 앤 하이드〉를 만들어 낸 셈이다.



지금 이 순간(This is the moment)


확신한다. 〈지킬 앤 하이드〉를 보지 못했거나, 알지 못하더라도 이 노래만큼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임을. 〈지킬 앤 하이드〉가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소는 두말할 나위 없이 '지금 이 순간'이다. 이는 넘버가 가지고 있는 힘 때문이다. 웅장한 멜로디와 풍부한 스토리감. 실제 극에서는 다소 비장하고 슬픈 순간일 수도 있지만 넘버만 떼어놓고 볼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곡이다. 필자가 취미가 뮤지컬이라고 말하면 열에 예닐곱은 '지금 이 순간 불러주세요!'라는 말을 한다. 정말이다.


뮤지컬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 이 인상 좋은 아저씨 덕에 한국 뮤지컬 팬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뮤지컬 넘버의 대명사와 같은 이 곡은 '프랭크 와일드혼'이 작곡했다. 프랭크 와일드혼은 자타공인 한국이 가장 사랑하는 뮤지컬 작곡가다. 그가 작곡한 작품 중 한국에 소개된 것만 십여 개에 이른다. 〈지킬 앤 하이드〉, 〈더 라스트 키스〉, 〈데스노트〉, 〈마타하리〉, 〈천국의 눈물〉, 〈웃는 남자〉 등 그가 참여한 작품들은 한국에서 모두 큰 인기를 누리고 계속해서 무대에 오르고 있다.


프랭크 와일드혼이 작곡한 넘버들의 장점은 클래식과 팝의 조화와 감정선에 있다. '지금 이 순간'이 이렇게 유명하게 된 이유 역시 필자는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멜로디의 흐름과, 넘버의 상황이 주는 극적 매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넘버가 이슈가 되며, 극은 자연스럽게 마케팅이 되었고 결국 지금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넘버,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뮤지컬 말이다.




ⓒ 트루뮤지컬컴퍼니


〈지킬 앤 하이드〉는 어쩌면 한국 뮤지컬일지도 모른다. 원작의 틀과 이야기, 넘버를 가지고 왔지만 한국의 제작역량과 한국의 배우들, 한국의 마케팅을 통해 재탄생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10여 년 성공적으로 공연을 올린 한국에서의 장점들을 각색해 한국 제작자인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가 한국 크리에이티브 팀을 이끌고 〈지킬 앤 하이드〉 월드투어 공연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중국의 한한령(限韓令) 때문에 실제 투어는 무산되었지만, 그와 같은 시도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국내 뮤지컬의 수준과 완성도가 높아진 것이다.


사실 공연을 완성시키는 건 바로 관객이다. 결국 〈지킬 앤 하이드〉를 지금의 반열에 올린 것은 공연을 사랑해주는 관객들이었다. 앞으로도 훌륭한 배우들과 연출을 기반으로 계속해서 전설을 써내려 갈 〈지킬 앤 하이드〉. 초심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그 역사가 이어지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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