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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현 Dec 17. 2020

채식의 시작이 넷플릭스라니?

다큐멘터리 한 편에서 시작된 소심한 채식

소심한 채식을 시작했다.


비건(Vegan)은 일종의 '선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오늘부터 채식을 할 거야,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것만 같았다. 내가 사는 동네인 해방촌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살아서인지 비건 레스토랑도 있고, 일반 음식점에서도 비건 메뉴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오며 가며 채식을 접할 때마다 한 번쯤은 시도해보고 싶었지만 늘 두려움이 앞섰다.


두려움의 원천은 단백질과 근육이었다. 고기를 먹어야 힘을 낼 수 있고, 몸이 좋지 않을 때면 고깃국물을 들이켜야 보양이 된다고 믿어 온 세월이 삼십 년이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단백질은 근육이다!'의 공식을 깨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물론 여기서의 단백질은 대부분 닭가슴살이나 소고기다. '채식을 하면 체중 조절과 건강에는 좋겠지만, 운동능력과 근육량은 떨어질 거야. 그러니 섣불리 시도하지는 말자.'라는 짧은 생각이었다.



그런 나에게 채식을 시도하게 해 준 것은 놀랍게도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한 편이었다. 〈더 게임 체인저스The Game Changers, 2018〉라는 강력한 이름의 이 다큐가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었던 진리에 가까운 환상을 깨고 육식주의자에 가까웠던 나에게 채식의 진실을 말해주었던 것이다.


이 소심한 채식은 한 유튜버의 브이로그에서 시작되었다. 올해 새로운 운동을 하나 시작하고 싶어 평소 관심 있게 보던 주짓수를 시작했는데, 한 주짓수 유튜버가 넷플릭스의 다큐 한 편을 보고 채식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주짓수 브라운벨트에 운동량이 선수급인 사람이 채식을 한다니?



곧바로 유튜브를 끄고 넷플릭스를 틀었다. 유튜버가 말해준 '더 게임 체인저스'를 검색했다. 시작이 강렬하다. 다른 많은 채식 다큐들이 죽어가는 동물들의 모습이나 파괴되는 환경 자원을 보여주었던 것과 달리, 이 다큐는 미 해병대 훈련 장면으로 시작한다.


브루스 리를 동경하던 소년은 15년 후 5개의 무술 블랙벨트를 보유한 실력자가 되지만 양 무릎인대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해 재활에 집중하게 된다. 신체의 회복과 재활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는 원조 격투 전문가인 로마 검투사들의 대다수가 채식주의자였다는 비상식적인 연구결과를 알게 된다.


다큐는 이 사실에서 출발해 채식주의자인 운동선수들을 조명하기 시작한다. UFC의 좀비 파이터인 네이트 디아즈, 울트라 마라토너 스콧 주렉, 육상 400m 호주 챔피언인 모건 미첼 등 정상급 운동선수들, 그리고 뒤에는 무려 보디빌더이자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낸 '터미네이터' 아널드 슈워제네거까지 나와 입을 모은다. '채식이 운동능력 향상에 더 도움이 된다'라고 말이다!


아저씨까지 그러시면 좀 배신감이 드는데?


다큐가 이야기하는 것은 간단하다. 동물은 단백질의 전달자일 뿐 식물을 통해서 더 양질의 단백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채식주의를 했을 때 더 나은 운동능력의 향상을 볼 수 있고, 체내 건강의 지표들이 좋아지며, 하물며 육식을 하는 다른 운동선수들보다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육식을 근육과 단백질과 남성성의 기반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저 마케팅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다큐는 말한다. '인간은 원래 채식주의자로 태어났다'고.


믿을 수 없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사례들이 계속해서 나오는 탓에 호기심이 늘어갔다. 그래도 믿을 수 없었다. 저 사람들은 알고 보면 육식을 했어도 1등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예외적인 사례들을 모아 마치 진실인 것처럼 말하는 과잉 일반화의 오류는 아닐까? 게다가 상대는 넷플릭스였으니, 더더욱 방심할 수 없었다.



나의 의심을 알기라도 한 듯, 다큐는 육식과 채식의 비교를 시작한다. 미국 NFL 마이애미 돌핀스의 운동선수 세 명을 대상으로 첫날밤에는 각각 양질의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가 든 부리또를, 다음 날에는 식물성 소고기, 식물성 돼지고기, 식물성 닭고기가 든 부리또를 먹인 뒤 수면시간 동안 혈류량을 비교한 것이다. 혈류량 비교의 대상은 남성성의 상징인 음경의 발기 정도다.


다소 민망스러운 이 비교연구에서 세명의 남성은 (무엇인지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강직도, 지속성, 횟수에 있어 모두 식물성 단백질에서 압도적인 결과를 낸다. 위 사진 상의 혈액만 비교해도 차이를 눈으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다. '스테이크는 남자의 음식이다', '고기를 먹어야 건강해진다'는 믿음이 깨진 것이다. 여기서 조심스레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한 번 해볼까?



이후 다큐는 채식과 육식의 테스토스테론 수치나 영양성분, 잘못 알려진 의학적 지표들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더 이상의 이야기는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채식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두려움이 어느 정도 잘못된 믿음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한 덩이 고기를 만들기 위해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기회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채식을 시작하게 되는 신념과 계기는 다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채식을 피해왔던 이유가 오히려 채식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가 된 셈이다.


물론 다큐멘터리 한 편의 내용을 모두 신뢰할 수는 없다. 구글에 'The Game Changers Criticism'만 검색해도 이 다큐에 대한 수많은 비판과 반박자료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기존의 채식을 권장하던 콘텐츠들과 달리 운동능력과 체성분 등을 기반으로 식단을 비교하 다양한 케이스를 보여주었고, 육식이 가지고 있었던 환상을 현실로 끌어내렸다는 점에서 충분한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게 마켓컬리에서 비건 메뉴들을 찾아보고, 나름대로 조리해서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채식 식단을 시도해보고 있다. 과정이 재미있다. 비욘드미트로 만든 베이글 샌드위치는 처참하게 실패했지만, 비건 라구 소스와 두부면으로 만든 파스타는 기존 파스타보다 더 맛있을 정도다. 기존 프로틴 셰이크 대신 구매한 식물성 프로틴 셰이크 역시 훌륭하다. 이렇게 소심하게 소소한 채식을 늘려가고 있다.



넷플릭스를 영화나 드라마의 장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생각보다 넷플릭스에는 양질의 다큐멘터리들이 많다. 그것도 정치, 시사, 환경, 학문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시의성에 맞는 흥미로운 다큐들이 론칭된다. 영화와 드라마 속 양질의 다큐를 찾아보는 것도 넷플릭스를 보는 큰 재미다.


어찌 됐던, 어쩌다 보니, 넷플릭스 덕분에 채식을 시도하게 되었다.

역시, 콘텐츠는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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