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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지쥬스 Apr 06. 2020

다시 쓰기

지구 위의 아직 살아남은 종들은 각자의 살아남은 비결이 있다. 나는 쉽게 잊는 것으로 살아남은 종이다. 불쾌한 일, 끔찍한 일, 견딜 수 없는 순간,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상황들이 찾아올 때면 나는 그것을 기억에 담지 않으려 노력해왔다. 그 상황을 정의내리지 않고 그 순간 내가 느끼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일기를 쓰지 않는다. 모든 것은 문자로 옮기는 순간 확실해진다. 누군가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보고 느낀 것을 언어를 옮길 수 있게 될 때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반대로 말하면 언어로 옮기지 않는 것은 기억이 되지 않는다.


나는 일기를 쓰는 대신 소설을 썼다. 소설은 심리상담사 앞에서 나무, 집, 사람을 백지 위에 그리는 일이기도 해서, 나는 내가 무엇을 쓰는지도 모른 채 이야기를 쓰고, 쓴 걸 읽으면서 요즘의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있는지 어렴풋하게 짐작해보곤 했다. 내 소설을 읽은 친구가 말한 적이 있다. 넌 구체성이 부족한 것 같아. 나는 웃어넘기는 척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다 들킨 기분이어서.


그것도 과거의 일이다. 요샌 그마저도 잘 안 쓴다. SNS 피드 몇 글자도 버겁다. 그럴수록 나는 흐리다. 내가 찍힌 사진을 볼 때마다 다 다른 사람 같다. 매일 잠시 머물다 흩어지는 지하철의 이름 모를 사람들 속에 내 얼굴들이 섞여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내가 누구인가 말하자면, 요즘의 나는 잠이 많고 출근이 싫다. 책상 앞에서 머리를 싸매다 점심시간엔 아무 말이나 한다. 퇴근길의 지하철에서 덜컹거리면서 하루를 잊는다. 성과를 낸 것, 실수를 한 것, 누군가와의 트러블, 누군가와의 농담, 다 잊는다. 집에 와선 유튜브나 넷플릭스 같은 것들로 지쳐 곯아떨어질 때까지 멍 때린다. 시간을 죽이는 것 같기도 하고, 시간이 나를 죽은 듯이 놔두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요즘의 나다.


이런 종류의 글, 말하자면 에세이를 쓴다는 건 두려운 일이다. 소소한 일화나 지나가는 생각들을 갈무리하는 이 간편한 양식의 글이 언제나 내겐 가장 두려웠다. 어쨌거나 그것은 나에 대한 진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의심 없이 확언해야 하기 때문이며, 순간의 기분과 생각을 영원할 것처럼 못박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미룰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너무 쉽게 잊고 살아서 이제 나에 대해서도 잊고 있다. 나는 이제 정의해야 한다. 써야 한다. 크든 작든,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글로 붙들어 놓아야 한다. 이 시간이 나를 잊기 전에 내가 이 시간을 기억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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