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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지쥬스 Apr 19. 2020

한없이 결말에 가까운

왜 삶은 영화처럼 아름답고 의미 있지 못할까

살다가 가끔은 영화를 본다. 영화는 두어 시간 동안 산만한 두 눈을 붙잡아 놓는다. 영화 안의 시간은 흥미롭고 인상적인 일들로 가득 차있으며, 그 일들의 인과를 통해 개연성 있게 연결되는 결말이 있다. 결말을 볼 때쯤 우리는 깨닫는다. 그때 지나쳤던 그 장면이, 대사가, 행동이 어떤 의미를 위해 거기 있었는지. 결말은 모든 순간들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든다. 영화란 의미 있는 순간들의 편집물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의미에 어울리는 제목을 갖게 된다.  


영화가 끝나면 현실의 삶이 계속된다. 삶에는 결말이 없다. 영원할 것처럼 이어질 뿐이다. 크고 작은 일들이 시작되고 끝나기를 반복하면서 삶은 계속 이어진다. 어떤 일들은 연결되지만 대부분은 아무 관련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어떤 일들은 너무 당연하게 반복되어 의미가 없다. 매일 출근길에 같은 역에서 내리거나, 프린터기에 용지가 떨어지면 A4지를 보충한다. 어떤 일들은 불가해하다. 출근길에 지하철을 반대로 탄 채 잠이 들어 생전 처음 와본 곳에 도착하거나, 프린터기 용지함을 열었을 때 생쥐를 발견한다. 그것들은 모두 아무 관련이 없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의 나열일 뿐이다. 편집되지 않은 삶에는 제목을 붙일 수 없다.


인생에도 마치 결말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가령 연인과의 이별은 그런 것들 중 하나다. 누군가를 사랑했다가 이별해서 마음이 무너지고, 그래서 이쯤이면 한 이야기의 결말이라 생각하며 잠들어도 아침은 여전히 커튼 틈을 비집고 들어온 햇빛으로 눈을 뜨게 하고, 인생은 계속되어 지루한 일상이 이어지다 별 생각 없이 보내는 하루들이 찾아오고, 그러다 어느 순간 지난 이별은 까맣게 잊은 채 눈앞의 사소한 행복에 집중하고… 시간은 분절되지 않고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온다. 결말은 해변에 쓴 글자처럼 적히는 순간 지워진다.  


죽음은 우리에게 가능한 유일한 결말처럼 보인다. 아무것도 계속되지 않고 과거를 돌이켜보는 일만 남는다면 삶은 편집되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죽음조차 완전한 결말일 수 없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가 된다면 눈앞에 결말이 담긴 마지막 페이지가 보일 것이다. 내게 주어진 삶이 무엇이었는가 되돌아보며 거기에 어울리는 제목을 더듬어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끝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순 없을 것이다. 마지막 페이지에 도착했을 때, 우리에겐 더 이상 그걸 넘길 손과 읽을 눈이 없을 것이다. 마지막 페이지의 뒷면은 곁에 남겨진 사람들만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할아버지의 화장터에서 보았던 사람들의 표정과 남겨진 자식들 간의 짧은 다툼과 한 줌의 재를 할아버지가 보지 못했듯이.


다행인 것은 인간이 한 줌의 상상력을 가진 존재여서 죽음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말에 다다를 수 없는, 그래서 만성적인 의미 결핍을 앓아야 하는 우리들에게, 죽음에 대한 상상은 잠시나마 우리의 손에 편집권을 쥐어준다. 내가 지금 죽는다면 나의 지난 삶은 어떻게 비춰질까. 혹은 내가 일주일 뒤에 죽는다면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한 달 뒤라면, 일 년 뒤라면. 상상만으로 인생에 완전한 제목을 붙일 순 없지만 무수한 가제들을 붙일 순 있다. 원하는 결말에 도착하진 못하더라도 그 결말과 한없이 가까워질 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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