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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지쥬스 Jun 03. 2020

별일 없는 군산여행

군산에 갔다 왔다

군산은 빈 것이 많은 도시였다

비어있는 집, 상점, 건물

짓다 만 것인지 허물다 만 것인지 모를 멈춰있는 공간들

훔친 것도 없는데 도둑이 된 기분으로 여기저기 머리를 드밀고 다녔다

비어있는 걸 보면 들여다보고 싶다

깊숙이 머리를 넣고 들여다보고 싶다

비어있는 걸 알면서도 그러고 싶다

빈 것을 들여다보면 결국 나를 보게 된다

정확히는 들여다보는 내 뒤통수를 보게 된다

저녁엔 아무도 없는 작은 일식집에서 연어덮밥을 먹었다

주방장 한 명과 나 둘뿐이었다

연어덮밥을 반쯤 먹었을 때 짐빔하이볼을 주문했다

주방장은 하이볼을 내밀며 혼자 왔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별 일 없다고 하니 그건 정말 큰 일이라고 했다

주방장은 나를 쳐다보지 않고 무언가 손질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마치 혼자 온 사람을 위한 특선 요리를 준비하듯이

자신이 연고 없는 이 도시에 와 가게를 차리기까지의 이야기를

무언가 끊임 없이 손질하면서, 하지만 그 무언가는 내 자리에선 보이지 않고

그건 일종의 무서운 이야기였다

입 안의 연어가 비리게 느껴졌다

나는 유리잔의 얼음이 녹기 전에 가게를 나왔다

밤의 호수가를 걸었다

오래 걸었다

숙소로 돌아올 땐 거리에 택시가 없어

빈 손만 소득 없이 흔들어댔다

이십분만에 만난 택시기사는 모든 신호를 무시한 채 달려

나를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줬다

여긴 밤 되면 아무도 없어서 괜찮아요

마치 그것이 군산의 법칙이라는 듯이

늙은 택시기사가 마스크 뒤에서 웅얼거렸다

아무도 없어서 괜찮다는데

나는 숙소 앞의 횡단보도에 서서 유난히 긴 신호를 기다렸다

그냥 건너도 될 것 같은데 그냥 기다려도 될 것 같았다

새벽 두 시에 잠에서 깼다가 새벽 세 시에 다시 잠들었다

다음날도 여전히 흐렸다

나의 군산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름 뒤에서 지나갔다

그거 아는지, 군산은 고양이가 많은 도시다

사람이 드문 이곳에선 유난히 현관문 앞에 길고양이를 위해 밥그릇을 놓아둔 집이 자주 보였다

살찐 고양이들이 굼뜬 동작으로 다가와 사람을 무심하게 쳐다보곤 했다

어떤 고양이들은 내게 먼저 다가와 발목에 허리를 비비기도 했는데

나중에 찍은 영상을 보니 고양이를 쓰다듬는 내 손이 너무 서툴어서 우스웠다

마리서사라는 서점에선 만화책을 한 권 샀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다 봤다

그 만화를 본 일이 군산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

차를 빌려 바다를 보고 오기도 했는데 그건 굳이 적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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