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먼지쥬스 Aug 03. 2019

[리뷰] <미드소마> 종교라는 이름의 호러

신앙이 있는 분들에겐 불편할 수 있습니다.



* 스포일러를 포함하는 글입니다.



결핍


세상은 혼돈이다. 무질서한 우연의 연속이다. 행복과 불행은 확률게임이다. 행복이 계속되는 사람이 있으면 불행이 계속되는 사람도 있다.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하소연해도 세상은 답을 주지 않는다.


<미드소마>의 대니는 불행한 사람이다. 그늘진 가정에서 자랐다. 만성적인 우울증과 분리불안을 안고 있다. 그녀의 동생도 마찬가지인데, 대니보다 좀 더 심하다. 그래서 자동차 배기가스를 밀폐된 집에 연결해 부모와 함께 자살을 택한다. 천애고아가 된 대니에게 믿을 사람은 남자친구 크리스티안 뿐인데, 크리스티안은 대니의 애착을 버거워한다. 크리스티안의 친구들은 대니와 헤어지라고 한다. 친구들은 대니를 적대시하고 소외시키지만, 그럼에도 대니는 떠날 수 없다. 이제 그 작은 울타리가 대니가 마음을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소속이자 사회이기 때문이다. 혼자 남겨질 수 없었던 대니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안고 크리스티안의 친구들과 스웨덴의 미드소마 축제로 떠난다. 완전한 결핍 상태의 그녀는 애착인형을 품에 끌어안듯 남자친구의 곁에 붙어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지금 대니의 유일한 선택지다.



통과의례


미드소마 축제가 열리는 호르가로 건너가기 전에 그들은 통과의례를 거친다. 축제의 길목에서 만난 펠레의 사촌은 대마초를 권하고, 그것은 그들을 무의식의 세계로 휩쓸어간다. 여행이라는 응급치료로 애써 급하게 봉합해놓았던 대니의 마음이 무장해제된다. 그녀가 직면한 가장 큰 두려움들이 풀려난다. 죽은 부모와 여동생의 얼굴과 직면하고, 크리스티안의 친구들이 자신을 버리는 상황과 직면한다. 물론 그것들은 모두 환각이지만 대니는 현실과 환각을 구분할 수 없는 가장 구체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결핍을 마주한다. 그리고 대니가 이 의식을 치르게 되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자신의 상처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지시킨 뒤 호르가의 세계는 마치 처방전처럼 대니에게 다가간다. 다시 말해 호르가식 세례다.


또한 이때 대니가 겪는 환각은 1인칭 시점으로 관객에게 전해진다. 관객은 환각에 빠진 대니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대니가 보고 있는 환각에 함께 빠진다. 관람은 체험이 된다. 이 경험은 영화가 계속될수록 더욱 강렬해진다.



새로운 질서


세상이 혼돈이라면 종교는 질서다. 종교는 혼돈으로 남겨진 세상의 모든 것들에 의미를 붙이고 인과관계를 설정한다. 그것들로 하나의 세계관을 완성한다. 그 세계관 안에서 작동하는 규율과 질서를 만든다. 일행들이 도착한 호르가는 그런 곳이다. 그곳은 평화로운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며 그런 끔찍한 일들이 평화롭게 반복되는 곳이기도 하다.


일행들이 가장 먼저 대면하는 사건은 두 노인 남녀의 자살이다. 호르가에서 인간의 수명은 72세까지로 정해져있다. 72세 이후의 인간은 의식을 거치고 절벽에서 떨어져 죽어야 한다. 이건 대니가 겪은 부모의 죽음과 상반된다. 대니의 부모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죽임당했다. 그날 밤이 그들의 마지막 밤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우연이자 불가해의 영역이다. 그러나 호르가에서 모든 죽음은 확정적이다. 정해진 나이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방식을 통해, 스스로 발을 내딛어 죽는다. 죽음은 예기치 못한 사고가 아니라 예정된 수속을 밟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그들의 죽음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집단 안에서의 환생으로 순환한다. 그들은 죽어서도 소속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잃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의 죽음을 겪고 상실감에 몸부림치는 대니와는 다르다. 대니는 이 장면을 바라보며 오열하지만, 이어지는 영화의 내용을 보면 대니가 느낀 감정이 단순한 충격과 공포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미 이 순간부터 호르가는 대니에게 상실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으로 다가갔을지 모른다.



동질적인 집단


호르가에는 부모가 없다. 낳은 자식을 모두가 함께 기른다. 모두가 동시에 포크를 들고 식사를 시작하고 손을 맞잡고 어울려 춤을 춘다. 심지어 경전도 함께 써나간다. 이건 일반적인 종교와는 조금 다른 부분인데, 특정한 절대자가 종교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집단의 한 구성원으로 집단을 성립시키기 위해 산다. 다시 말해, 이들은 모두가 동질적이다. 모두가 같은 의식과 같은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 그 안에 개인이라는 개념은 없다. 그들이 죽을 때 굳이 해머를 동원해서라도 얼굴을 으깨버리는 것은 그래서이다. 얼굴은 사람과 사람을 구분 짓는다. 신체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영역이다. 그러나 그들은 개인으로서 죽어서는 안 된다. 또 다른 얼굴로 집단 안에서 다시 환생하기로 예정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죽음은 개인의 얼굴을 지우는 의식으로 치뤄진다.


그들의 동질성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막스다. 크리스티안과 마야의 섹스는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섹스는 가장 은밀한 순간을 포착한다. 카메라는 어두운 공간에서 밀착한 두 사람을 클로즈업으로 담아낸다. 역동적인 몸짓들이 역동적인 카메라워크 속에서 그려진다. 그러나 <미드소마>의 섹스는 사적인 행위가 아니라 공적인 의식으로 그려진다. 크리스티안은 벌거벗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마야와 섹스를 한다. 주위를 둘러싼 여자들은 마야와 함께 호흡하고 신음한다. 함께 느끼고 함께 절정에 오르며 여러명의 목소리가 뒤섞이고, 그 소리는 마치 성가대의 합창처럼 울려퍼진다. 그것은 개인과 개인의 교감이 아니라 한 사회가 이질적인 개인을 흡수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정적이다. 피사체와 조금은 떨어진 거리에서 고정된 구도로 장면을 담아낸다.


이때 같은 일이 대니에게도 일어난다. 크리스티안의 섹스를 목격하고 슬픔에 빠져 통곡하는 대니에게 여자들이 모여든다. 그들은 대니의 통곡소리에 호흡을 맞춰 함께 흐느낀다. 희열과 슬픔, 두 덩어리의 목소리들이 교차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반응은 조금 다르다. 크리스티안은 사람들의 교감 때문에 몰입하지 못한다. 섹스를 진행하다가도 어리둥절해한다. 엉덩이를 밀어주는 민망한 도움을 받기까지 한다. 하지만 대니는 다르다. 대니는 그 어느때보다도 격렬한 감정 속에 던져진다.


대니는 이전까지 혼자 우는 사람이었다. 남자친구에게조차 쉽게 눈물을 보일 수 없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을 땐 황급히 무리를 벗어나 혼자 화장실에 숨었다. 배설하듯이 눈물을 수습했다. 그래야 가까스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르가에서 그녀는 마침내 함께 울어줄 사람들을 만난다. 이것은 가장 원형적이며 직관적인 방식의 공감이다. 언어를 모르는 동물들도 함께 울음소리를 내는 것으로 교감한다. 관객은 이 장면에서 어떤 시각적인 충격보다도 더 참기 힘든 역한 감정을 느끼지만, 동시에 기시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한국의 장례식에서 울려퍼지는 곡소리나 기독교의 통성기도 등, 이미 우리 주변의 다양한 제의적 과정에서 같은 일이 일어난다. 이 과정을 겪고 나면 더 이상 함께 흐느낀 사람들을 낯설게 바라볼 수 없다. 같은 감정을 공유한 이들 간의 유대가 형성된다. 대니가 이 과정 이후 완벽하게 호르가의 사회로 스며드는 건 그래서다. 반면 크리스티안은 곰가죽을 쓴 제물이 된다. 크리스티안은 호르가의 거름이 될 수는 있지만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그에겐 호르가의 신앙이 자리잡을만한 크기의 결핍이 없다. 오직 결핍이 있는 자만이 그 신앙을 가질 수 있다.   



종교라는 이름의 호러


호르가는 평화롭다. 일반적인 사회의 시선으로 보기엔 견딜 수 없이 끔찍한 사건의 연속이지만, 그들의 세계 안에서는 사회를 순환시키고 믿음을 굳히는 과정의 반복에 불과하다.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추수를 하듯 축제 때 제물을 바쳐 한 해의 평안을 빈다. 영화는 그 과정을 전원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 안에서 관조적인 시선으로 보여준다. 관객을 놀래키거나 겁 주려는 악취미 없이 무덤덤하게 그려낸다.


이것이 많은 관객들에게 이 영화가 호러 영화인가, 에 대한 의문을 일으킨다. 호러영화라기 보다는 엽기적인 문화를 가진 한 호르가라는 부족사회에 대한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진다. 영화의 플롯 또한 호러 장르를 배반한다. 일반적인 공포영화는 이렇다. 주인공 일행이 공포스러운 존재와 만나게 되고, 위협이 구체화될수록 희생자들이 속출하며 거기서 벗어나려는 주인공 일행들의 몸부림도 거세진다. 이 영화도 처음엔 그 과정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호르가 속에서 외부인들은 시간이 갈수록 하나둘 사라지고 희생된다. 그러나 이 영화엔 몸부림이 미미하다. 가장 처음 희생되는 사이먼 코니 커플은 '초반에 희생되는 조연'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시간이 흐르며 마크와 조쉬도 그 뒤를 따른다. 하지만 둘은 이곳에서 빠져나가려다 희생당하기보다, 마치 홀리듯이 사라진다. 마크는 여자에 홀리고 조쉬는 학문적 호기심에 홀린다. 대니와 크리스티안 또한 점차 마약에 취한 채 호르가 속으로 흡수된다. 그래서 바라보는 관객도 마약에 취한 그들의 몽롱한 시선을 따라 호르가를 체험하게 된다. 영화가 결말로 향해갈수록 호러 장르의 농도는 옅어진다.


그런데 진짜 공포는 거기서 시작된다. 이 영화는 인물들 간의 외적 갈등이 미미하다. 대신 그 부족분을 대니의 풍부한 내적 갈등이 채운다.  우리는 호르가에 끌려들어가며 동시에 대니의 내면속으로 끌려들어간다. 다시 말해 단순히 대니가 호르가에서 겪는 사건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기괴한 사회에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여는 대니의 내면을 체험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누군가가 한 종교에 빠져드는 과정과 일치한다.


불행과 결핍 속에서 허우적대며 혼돈 속에 던져진 누군가에게, 질서정연한 세계관을 가진 종교가 삶의 해답을 제안하고, 감정적인 유대를 확인하는 종교적 체험을 통해 신앙을 완성한다. 호르가의 세계는 단지 그 방식이 낯설 뿐이지 본질적으로는 대부분의 종교와 동일한 과정을 밟는다. 바꿔 말하면,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종교라는 것에 호르가라는 새로운 외양을 입혀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종교를 낯설게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공포심을 느끼게 된다. 영화는 누군가의 결핍을 자양분 삼아 집단의 의식이 개인의 내면을 점령해나가는 과정을 150여분에 걸친 긴 러닝타임으로 충실하게 따라간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우리의 내면에 깃들어있는 어떤 신앙, 집단적인 의식 같은 것을 건드린다. 종교적인 믿음, 또는 사회적인 신념에 가려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악행들이 있다. 한나 아렌트는 그것을 '악의 평범성'이라 말했다. 집단학살을 자행한 나치는 싸이코패쓰 집단도, 세상에 악의를 품은 집단도 아니었다. 다만 나치는 그것이 옳다고 믿는 집단이었다. 그들의 사회 안에서 그것은 보편적으로 용인되었다. 호르가인으로 거듭난 대니를 안타깝고 가련하게 바라보는 우리에게도 보편이라는 상자 안에 감추어진 어떤 끔찍한 것들이 숨겨져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고 편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데, <미드소마>는 그곳을 가리키며 상자를 열어보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진짜 공포는 거기서 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