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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고래 Oct 22. 2023

지루한 방학 끝

우리 같이 노올자 #5.

 여름방학은 일주일 밖에 안 남았다. 방학생활, 일기, 곤충채집, 편지쓰기, 수수깡으로 집 만들기까지. 숙제가 많아 바빴지만, 엄마 말처럼 실컷 놀다가 개학 일주일 전에 몰아서 하려니 더 바빴다.

“아이. 지난 주 월요일에 날씨가 어땠지?”

“나도 몰라. 그걸 어떻게 기억하니?”

“아빠가 신문을 모아두지 않았을까?”

“아 맞다! 엄마 신문 다 어딨어요?”

“어제 고물 아저씨오셔서 다 줬어.”

“힝, 말도 안 하고!”

“뭐라고? 안 들려!”

엄마는 가게에서 일을 하느라 우리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없었다. 엄마는 대단하다. 아기를 업고 또 일을 한다.

소파에서 머리에 퍼머 약을 바르고 잡지를 보며 기다리던 한 아줌마가 우리를 보며 꽃분홍 손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옛다 200원. 너희 핫도그 사먹어라.”

“어머, 사모님. 애들 돈 주시지 말라니까.”

“열심히 공부도 하고 예뻐서 그렇죠.”

목사님 부인인 안젤라 사모님은 우리만 보며 돈을 주셨다. 덕분에 여름성경학교인지 캠프인지 따라간 적도 있었다. 

“언니 언니!”

진이는 200원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잘 했어. 언니 방학숙제 끝나면 같이 가자.”

진이는 엄지를 들어 보였다 .

 하지만 나는 힘이 쭉 빠졌다. 방학보다는 학교에 가는 것을 더 좋아하는 내게는 방학일기 쓰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방학 생활은 정말 단조롭고 평범했다. 아기 보느라 미용실에 있느라 엄마도 바빴지만 그 엄마를 돕는 아빠도 여유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빠는 내년에는 꼭 자연농원에 데려가겠다고 하였다. 

‘작년에 사촌 언니랑 갔던 자연농원이 진짜 재밌었는데.’

 나는 지구마을에서 듣던 음악을 흥얼거렸다. 슬픈 지구별 이별식이랄까. 그렇게 애틋할 수가 없었다. 별처럼 많은 형제, 지구마을 친구들이 나에게 건넸던 손인사! 여하튼 일기에 딱히 쓸 만한 내용은 없다. 귀연 언니를 따라 여름성경학교에 간 일이 제일 큰 이벤트였다. 귀연언니는 안젤라 사모님이랑 같은 교회를 다닌다.

‘여름 성경학교는 정말 별로였어.’ 

 귀연 언니는 귀신이야기 만큼 하나님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어서 성경 퀴즈 1등을 했다. 진이와 나는 수많은 선물들 앞에 넋이 나가 있었다. 당연히 초짜인 우리는 아무 퀴즈도 맞힐 수 없었다. 수학이나 국어 과목에서 퀴즈가 나왔다면 1등을 했을텐데!

우리는 안젤라 사모님이 주신 200원을 들고 태양연립이 있는 건너편 동네로 갔다. 똑같이 생긴 5층 아파트가 여덟 동이 붙어 있었다. 연립 정문 앞 상가 안에는 치과와 이비인후과, 책방, 연희네 수퍼마켓 등 가게들이 지하부터 2층까지 있었다. 상가 주변으로는 핫도그와 어묵을 파는 리어카들도 있다. 분홍색 작은 소시지에 노란 밀가루 반죽을 겹겹이 둘러 감아 튀기는 핫도그를 보며 우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설탕 묻혀줘?”

“네. 많이요. 케첩도 많이요.”

우리는 소시지만 남기고 빵을 먼저 다 먹었다. 소시지는 아까워서 조금씩 천천히 먹었다.  

“언니,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핫도그야.”

“그치? 하루에 열 개 먹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맛있는 걸 엄마는 왜 자주 안 사주지?”

“몰라. 엄마는 원래 뭐 잘 안 사주잖아. 책은 사주겠지.”

“맞아, 책이 훨씬 더 비싼데 말이야.”

“계몽사 전집 하도 읽어서 지겨워.”

나는 책이 더 읽고 싶었지만, 집에는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었다. 책을 놓을 공간도 없었다. 우리는 핫도그를 다 먹고 지하에 있는 우리책방으로 내려갔다. 새로 나온 만화잡지, 표준백과, 동아백과, 브로마이드를 차례차례 구경했다.

“이 만화잡지 사고 싶다.”

“얼만데?”

“4천원.”

“뭐 4천원?”

“세뱃돈 모아서 사야지. 언젠가 꼭 살 거야. 여기 브로마이드, 선물도 많다.”

“선물? 뭐 주는데?”

“교환일기장이랑 팬시주머니.”

“우아 좋다. 근데 언니.”

“왜?”

“나 오줌 마려워.”

“야 너는 꼭 밖에 나오면 그러더라.”

나는 진이 손을 잡고 집을 향해 골목길을 뛰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거리에는 이따금씩 강아지풀만 보였다. 꼬리를 살랑거리며 가을을 맞이하고 있는듯했다. 

‘아, 빨리 개학했으면 좋겠다. 선생님 편지는 오늘 왔을까?’

 선생님이 유독 보고픈 날이다. 선생님의 상냥한 목소리, 샴푸냄새, 환한 미소 모든 것이 그리웠다. 방학하자마자 선생님께 편지를 썼지만 아직 답장은 없었다. 선생님 집은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동이었다.  

‘춘하동에서 문래동이 먼가? 서울까지 얼마나 걸리지?’

나는 서울에 한 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서둘러 집에 왔을 때 진이는 이미 화장실로 토끼처럼 뛰어갔고 엄마는 소파에 앉아 수건을 개고 있었다.

“경이야 왔니? 고생했다. 참, 편지 왔다.”

“진짜? 편지? 선생님한테요? 어디, 어디?”

“테이블 위에 두었어. 녀석. 그렇게도 좋니?”

엄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답장이 진짜 왔네! 와아!”

하늘색 봉투는 하늘을 닮았다. 선생님 글씨, 우리집 주소, 비둘기로 보이는 평화로운 새 그림. 

<경이에게-❁>

‘어떻게 이렇게 좋은 향기가 나지? 향수편지지인가?’

 봉투를 열고 편지지를 꺼내니 꽃내음이 확하고 퍼져왔다. 라일락 같기도 하고 달콤한 꿀 같기도 했다. 울렁거렸다. 멀미날 것 같았다. 혼자 숨어 읽고 싶었지만 우리집엔 그런 공간은 없었다. 나는 무더운 날씨에도 이불을 덮어 편지를 읽어 나갔다. 

“너도 참 유난이다!”

엄마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이미 나는 하늘닮은 편지 속에 푹 빠져있었다. 반복해서 읽어 거의 외워버렸다. 엄마는 별로 특별한 내용도 없는데 호들갑이라면서 퇴근하는 아빠에게 고자질했다. 아빠는 답장해 주는 선생님이 참 좋으신 분이라면서 개학할 때 꽃이라도 사서 가라고 했다. 

‘역시 아빠!’


경이에게,

경이야 선생님이야. 방학 잘 보내고 있니?

경이가 쓴 편지 잘 받았어. 고맙구나.

선생님은 잠시 여행을 다녀왔어.

그래서 답장이 늦었단다. 미안해.

바다를 보고 왔는데 개학하면 우리반 친구들에게

자세히 얘기해줄게.

우리나라는 예쁜 곳이 참 많단다.

방학에도 엄마 잘 도와 드리고 있니?

동생들도 잘 보고 있지?

건강하게 지내고, 개학하면 만나자.

안녕.

1991년 8월, 박은혜 선생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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