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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앙 Oct 24. 2023

소개팅남의 친환경 라이프녀 적응기

 개팅남은 종손이다.

 렇다고 TV에서나 볼 법한 갓 쓰고 도포 입고 꼬장꼬장한 그런 집은 전혀 아니다. 그래도 1년에 명절 포함해서 제사만 9번이고 김장은 무, 배추 모종부터 시작한다. 결혼 초반 코로나로 인해 친척들이 거의 모이지 않았는데 잠잠해지자 설날 명절에 다녀간 사람들이 30명 가까이였던 거 같다. 기다 위로 누님 2분이고 같은 항렬에 남자라곤  하나다. 


  결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날 꼬시기 위해 부단히도 애썼다. 거의 매일같이 수원에서 마곡까지 차로 데리러 오곤 했다. 당시 나는 회사일이 너무 많아 10시나 11시는 되어야 퇴근했었다. 헌신적인 소개팅남 덕분에 한동안 편하게 집에 갈 수 있었다.


 소개팅남은 올 때마다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가지고 왔다. 내 취향을 아직 모르니 종류별로 사 왔다.  무거운 캠핑용 냉장고를 차에 설치까지 해서 음료수를 시원하게 마실 수 있도록 했다.


 시 나는 제로웨이스트 라이프로 살아 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작은 물건 하나 살 때마다 엄청 따지면서 고르고 골랐다. 보온병 뚜껑에 조금이라도 플라스틱포함되어 있는지, 겉포장은 종이라도 내부포장은 비닐인지, 같은 종이라도 코팅 종이인지 꼼꼼히 살펴봤다. 덕분에 살만 한 게 없어서 못 사고 불편한 생활을 감수하던 와중이었다. 이런 내 라이프스타일을 모르고 밤마다 플라스틱통에 들어 있는 음료수를 가져다 주니 고맙긴 했지만 반갑진 않았다.


몇 번 얻어 마시고 나서 말했다.



"실은 환경에 관심 있어서 플라스틱 음료수는 잘 안 마셔.."


 그다음 날 소개팅남은 병음료로 바꿔 왔다. 편의점 직원과 둘이서 병음료를 한참 찾았다고 한다. 결국 두유로 골라 왔다.



"뚜껑에 비닐이 씌워져 있어.. 글구 두유 안 좋아해."


 날이 선선해지기 시작할 때라 차량용 커피포트와 물, 티백을 준비했다. 물은 커피포트에 담아 왔다.



"티백도 쓰레기야"


 그다음 날, 그는 집에서 차를 우려 텀블러에 담아 왔다.



 평 한마디 없이 한 단계씩 내 수준에 맞춰 주었다. 그의 변화가 고맙고 만족스러웠다. 비록 지금은  맥시멀리스트지만 이렇게 변해준다면 나의 미니멀라이프이자 친환경 생활방식 그에게 주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를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감히...


 착각이었다. 결혼 후 나는 잡힌 물고기가 되 버렸다.  그의 취미는 여전히 프라모델이고 거의 매일같이 쿠팡에서 물건이 온다. 오늘도 출근하는데 문 앞에 쿠팡 비닐봉다리가 있다. 나는 그냥 종가집 며느리가 되었을 뿐이었다.


오늘 아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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