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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앙 Apr 14. 2024

남의 집 청소하러 휴가 냈다

 새로운 업무에 도전해 보겠다 부푼 의지와 하면 되지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생각보다 나의 역량은 충분치 않았다. 쓸데없이 사람들과의 관계에 고민하고 비교하느라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옆에 앉은 5년 차 선임보다 보고 장표 하나 뚝딱뚝딱 못 만들고 팀장님 없이 고객 만나는 것도 불안하다. 지3개월 동안 공부만 하고 있지 ESG 사업 중에 무엇 하나 구체적으로 진도 나간 게 없다.


 물론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아는 건 아는 거고 그것과 별개로 스트레스는 받고 있었다. 뭐든 척척 해내고 싶은데 나의 부족함이 드러날 때마다 부끄럽고 답답하다.


 날 환기시킬 무언가가 필요했다.


 회사에 유니라는 친한 지인이 있는데, 가 점심 같이 먹으며 이런저런 회사 얘기나 사적인 얘기도 나누는 사이다. 며칠 전 유니와 같이 점심 먹었다. 서로의 스트레스 강도를 비교하며 회사 뒷담화를 쏟아내는데 나의 스트레스와 불안감은 유니의 무기력함에 비하면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회사일에 지쳐 있었다. 위로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위로법, 유니의 집 정리를 도와주기로 했다. 바로 그 주 금요일 휴가 내고 목장갑 2개 들고 유니의 집에 갔다.


 8년 전, 내가 처음 미니멀리스트를 시작한 계기는 무기력함이었다. 한여름 더위에 몸은 처지고 재미있는 것 하나 없는 나날들 연속이었다. 새로운 취미를 가질 여유도, 새로운 사람들을 사귈 에너지도, 돈을 쓰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이 한여름이 지나면 좀 나으려나 하던 어느 날, 지인이 '우리 집엔 아무것도 없어'라는 일본 만화책을 추천하며 빌려줬다. 점심시간에 읽고 바로 오후 반차 냈다. 그때부터 미친 듯이 버리기 시작했고 미니멀리스트라는 평생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클까,

 내 스트레스를 풀 수단을 찾았다는 기쁨이 클까.


모르겠지만, 유니의 집을 청소하며 회사일은 완전히 잊고 이 물건을 계속 쓸 것인가 말 것인가에만 집중했다. 물건으로 꽉 차 있던 공간에 여유가 생기고 무거운 쓰레기를 버리느라 등근육이 욱신거릴 때마다 혼자 중얼거렸다.


아~~~ 행복해~~~


책과 잡동사니로 꽉 차 있었던 유니의 책장은 오래된  한용운의 시집과 돈을 불러온다는 닭이 돋보이는 장식장이 되었다. 현관문 입구 통로를 떡하니 막고 있던 책상은 잔뜩 올려둔 물건을 정리했더니 필요 없어졌다.


Before
After

뭐가 약인지 뭐가 화장품인지 모를 만큼 복잡했던 화장대도 싸악 정리하고

화장대 before & after


 로로 인한 누수로 엉망이 되어 없는 셈 쳤던 베란다는 해가 화사하게 들어 당장이라도 모종을 사서 꾸미고 싶은 곳이 되었다. 유니가 봄상추 잔뜩 심었으면 좋겠다.


 큰 쓰레기를 버릴 때마다 경비 아저씨한테 보고해야 했다. 경비 아저씨 혼자 아파트 단지를 관리하느라 경비실에 잘 계시지 않는다 했는데 다행히 그날은 하루 종일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대여섯 번을 왔다 갔다 하니 이사 가냐고 물으셨다. 뿌듯하다. 경비 아저씨의 이사 가냐는 말 한마디로 오늘의 작업 성공이란 생각이 들었다.


 유니의 집에 아침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있었다. 내 계획은 3시까지만 하는 것이었는데 계속 여기도 할까, 저기도 할까 하다가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6시쯤부터 유니는 이제 좀 갔으면 하는 눈치8시에 약속이었기 때문에 퍼질고 누워 7시까지 버텼다. 같이 막장 드라마 보다 겨우 일어났다.


아~ 뿌듯하고 행복해~


 하나 아쉬운 건 옷방을 정리하지 못했다는 것. 집정리의 끝판왕은 옷방인데 말이다. 유니의 다음 무기력함과 나의 스트레스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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