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남자친구의 일기장을 입수했다> 카테고리에 글을 쓴 시점은 3월이다. 7개월간 우리는 참 느리고 안쓰럽게 헤어짐을 준비했다. 내가 가장 잘하는 말이기도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궁금해할 "왜?"에 대해 대답하자면, 나 역시도 이럴 줄 몰랐는데 그냥 그렇게 됐다.
공식적인 마지막 통화에서 작음이는 나에게 필요하다면 나를 글감으로 계속 써도 좋다고 말했다. 한 줄의 글을 쓰기 위해 한 면 가득 생각을 채우는 나에게 그건 고문에 가까운 배려다. 얘는 글 잘 쓰다가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하셨을 독자들을 위한 이 마지막 글을 끝으로 해당 카테고리는 문을 닫을 것이고, 그간의 기록도 너무 늦지 않게 지울 것이다.
*작음이: 전 남자 친구(진심으로 행복하되 나보단 덜 행복하길 바람)
어디선가 헤어짐에는 단계가 있다고 했다. '슬픔→부정→분노→초월'이었나? 분노가 먼저였나? 어쨌든 나도 비슷한 듯 다른 감정선을 겪었다. 헤어지기 바로 직전까지 꽤 오래 슬픔과 부정이 혼재되어 있었고, 오피셜한 이별 후에는 분노 대신 곧장 인정 단계에 돌입했다. 처음에는 '우리가 왜 서로 싫은 게 아닌데 헤어져야 하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해 힘들었지만, 이제는 받아들이는 단계가 되었다. 대답 없음이 대답인 것처럼 헤어짐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 헤어질 이유가 된 것이다.
헤어진 다음 날, 나는 본가로 내려갔다. 그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난생처음 가족들과 술을 마셨다. 그리고 F인 가족들에게 T인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나와 가장 비슷한 성향인 이모는 "너는 똑똑한 줄 알았더니~"라는 핀잔으로 시작했지만 기승전 내 편을 들어줬고, 엄마는 그 와중에 작음이의 안부를 묻기에 뱁새눈을 뜨며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진 이모부의 한 마디에 장마철 자동차 앞유리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미안하다 현타야. 우리가 너 힘든 거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눈치가 없었어. 미안해."
아니 당사자가 말을 안 했으니 모르는 게 당연한데, 본인이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미안하단다. 이후 약 세 시간가량(정말 세 시간이 넘음) 힘든 상황에서 가족의 중요성에 대하여 교육을 받으며 감동이 약간 휘발되긴 했지만 어쨌든 감사했다. 이런 사람들이 내 가족이라는 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밤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꽤 바쁘고 감동적인 하루하루를 보냈다.
갑자기 쓱 다가온 미화 여사님께서 인삼 꿀에 절인 거 먹어 봤냐고 물어보시기에 아뇨! 라고 대답했더니 지난주에 담그셨다며 인삼청과 인삼주(는 왜...?) 세트를 가져다주셨다. 사람이 자꾸 마르면 못 쓴다고 하시길래 헤어진 거 티 났냐고 물으니 그건 아닌데 뭔가 기운은 내야 할 거 같다고 하셨다. 꿀통 부여잡고 있는 푸처럼 인삼청을 붙잡고 열심히 타먹었다.
가족 여행도 다녀왔다. 원래 여름휴가로 계획했던 부산의 숙소가 태풍 때문에 도저히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 11월로 미뤄둔 것이 그야말로 '오히려 좋아'가 되었다. 장롱면허 효년답게 조수석에서 잘 거 다 자고 커피나 마신 게 다지만, 다 같이 네 컷 사진도 찍고(무려 세 번이나) 모두의 카톡 프사를 바꿀 수 있도록 인생샷도 남겨 드렸다.
정기 검진 겸 다니던 병원에서 좋지 않은 소견을 받아 큰 병원에 가기도 했다. 기존 병원을 다녔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의사 선생님의 따뜻함이 좋아서. 그러나 그날 따라 부작용이 팔만대장경급인 약을 두고 인터넷에 다 나와 있으니 이미 잘 알고 있을 거다, 당장 오늘부터 약을 시작해도 된다고 하시는데 실망감과 당혹스러움이 몰려왔다. 마치 학교가 전부인 학생에게 "너네 이거 학원에서 다 선행했지? 넘어간다~"하는 선생님을 마주한 듯한 기분이었다. 병원을 나오는 엘리베이터에 타자 마자 소위 네임드 병원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명의로 유명한 선생님은 24년 3월까지 예약이 꽉 차있었기에, 그분을 제외하고 수술 실력 및 환자들의 평가가 좋은 K대 교수님을 먼저 뵙기로 했다. 하필 병원을 골라도 작음이의 모교라니. 그렇지만 똑소리 나는 작음이 만큼이나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병원에 향했다. 세상에는 환자들 뿐인가 싶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던 탓에 예약을 했음에도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렸지만, 행복했다. 무려 검지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15년 전 병원 기록지를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는 걱정 어린 눈으로 묻는 나에게, 약을 먹을 이유도 없고 걱정할 상황도 아니라고 하셨다. 다만 모양이 변하거나 크기가 커지면 다른 조치가 필요할 수 있기에 6개월 뒤에 다시 만나자는 말과 함께. 건강이 최고라는 어른들 말씀은 세상의 진리다.
몇 달 전, 빅 브라더 보다 무서운 알고리즘에 이끌려 보게 된 글이 있다.'연인을 대하듯 나 자신을 대하라.'는 메시지가 아주 세게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나 자신에게는 그렇게 높던 인정의 허들이 작음이에게는 없었다. 그가 뱉는 모든 말이 예뻤고, 포카칩과 맥주를 들고 쫄래쫄래 걸어 오는 발걸음이 사랑스러웠다. 그에게는 대충도 없었다. 우리집 내 속옷은 꾸깃꾸깃 속옷함에 뭉태기로 던져놓았지만 작음이의 속옷은 꺼내 입는 순간부터 기분이 좋아질 수 있도록 정리했다. 옷 하나도 꼭 다려줘야만 속이 시원하고, 손톱이며 눈썹이며 다듬어 놔야 직성이 풀렸던 것도 그와 비슷한 취지였다. 어디서든 잘 정돈되고 산뜻한 사람이었으면 했다.
작음이 또한 그만큼 날 애지중지해줬던 것을 잘 안다. 뭐가 됐든 그냥 나 좋을대로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지난 2년간의 기록을 정리하며 참 많이 사랑했고, 사랑 받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아직도 가끔씩 여기 저기서 발견되는 작음이의 흔적과 조우하면 멈칫하고, 소중히 간직해 온 손편지들은 버리지 못했지만 다 지나갈 것임을 안다.
그리고 이제는 나 자신을 연인처럼 대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침대 패드를 바꿨다. 차콜을 연보라로 바꿨을 뿐인데 이게 뭐라고 기분이 좋아졌다. 쓸모없는 물건들을 버렸다. 이게 뭐라고 코딱지 만한 집이 쾌적해졌다. 바다를 보러 왔다. 이게 뭐라고 마음속까지 시원해졌다.
11월 13일 오늘은 내 생일이다.
이 글을 보신 분들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모두 내 생일을 축하해 주셔야 한다. 왜냐면 난 얼마 전 헤어졌고, 이것만으로도 징징거릴 사유는 충분하지 않냐며 무지성으로 공감을 요청드리는 중이다. 아파하느라 미뤄뒀던 일들이 많은데 그중 하나인 브런치도 다시 시작할 것이다. 모두 기분 좋은 하루가 되시길 바라며 지난 주말 고성에서의 한 컷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