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탈리스트>를 극장에서 한 차례 더 봤다. 봐야 할 영화가 산더미같이 쌓인 상황에서, 극장에서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은 <오펜하이머> 이후 1년만이었다. 영화를 다시 보고 발견하게 된 것들, 그때 미처 글로 적지 못한 것들 몇 가지를 남긴다.
서막에서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여성은 에르제벳이 아닌 조피아였다. 두 여인이 이후 내내 등장하지 않다가 2막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영화에서 처음 본 그녀가 에르제벳이라고 착각하는 오류를 범했다. 조피아로 영화가 시작한다면 영화의 수미상관 구조는 더욱 견고해진다. 서막에서는 조피아가 외부의 힘(군인)에 의해 자리로 위치해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는데, 에필로그에서는 스스로 걸어나와 마이크 앞에 서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능동적인 입지를 얻기 때문이다. 그렇듯, 영화에서의 직접적인 변화는 타인에게 억압받던 조피아가 주체성을 되찾는 이야기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착한 듯 보이는 조피아는 '중요한 것은 과정이 아니라 목적지'라는 연설을 하게 되는데, 이때 관객은 인터미션을 포함해 3시간 30분 동안 좇아간 라즐로의 과정이 무의미해지는 발언을 들으며, 라즐로와 같은 편에서의 무력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목적지가 제대로 된 목적지인가 하는 물음 역시 조피아는 피해갈 수 없다.
라즐로가 자신이 투약한 진통성 마약의 부작용으로 기절한 에르제벳을 병원에 데려갔을 때, 그 병원은 라즐로가 극 초반 에르제벳이 부재할 때 찾아간 성매매 업소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영화 내내 쌓아올린, 성적 결합과 죽음이 맞닿아있는 관계를 한 샷의 이미지를 통해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아틸라는 자신의 가게를 처음 찾은 라즐로와 자신의 부인 오드리가 대화가 잘 통하는 것을 목격한다. 이때 카메라는 아틸라의 시점 샷에서 망원렌즈로 라즐로와 오드리를 촬영하며 그들의 관계를 깰 수 없을 것만 같은 거리감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내 아틸라는 그 프레임에 침범해 멀리까지 걸어가, 라즐로를 데려옴으로써 위험한 관계를 해체한다. 중요한 것은 다음이다. 이후 작업을 진행하고 라즐로가 부유한 미국인 사업가 해리슨 밴 뷰런의 서재를 리모델링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라즐로와 아틸라는 그들 사회에서의 원만한 관계를 회복한다. 이는 '밀러'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미국인에 동화되었던 아틸라의 사고방식이, 라즐로와의 리모델링 작업을 통해 유대인의 것으로 회복되는 과정을 상징한다. 이는 오드리에게 위협이 된다. 거래를 성사시킨 직후 라즐로와 아틸라가 껴안고 좋아하는 것은, 미국인으로서의 가족을 지켜내고 싶은 오드리에게 위기감을 조성한다. 즉 이후 아틸라에 의해 라즐로와 오드리가 춤을 추게 될 때, 그들은 성적인 남녀관계가 아니라 아틸라를 사이에 둔 경쟁자로서 상대방에게 거부감을 느끼고 불편해한다. 아틸라는 둘 다 자기가 좋아하니깐 아무 생각 없이 서로를 이어주지만 말이다.
영화는 세 가지의 이동수단의 시점 샷을 보여준다. 첫째로 미국에 정착하기 위한, 라즐로가 필라델피아로 향하고 밴 뷰런의 집으로 향할 때 보여지는 자동차 시점 샷이다. 미국에서의 목적지를 향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이 샷은 속도감으로 인한 불안감을 조성하는 동시에 장활한 대지를 질주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가치를 상징하기도 한다. 밴 뷰런의 집으로 초대받았을 때 라즐로가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며 기뻐하던 것처럼 말이다. / 그러나 이 질주는 상업적 야심과 결합되었을 때 더욱 위험해진다. 자동차는 기차가 되고,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탈 사고가 일어나며 아메리칸 드림은 위기를 맞는다. / 에필로그에서는 배가 이동할 때의 POV 샷이 등장한다. 이는 라즐로와 가족들이 배를 타고 베네치아에 도착하게 되는 공간 이동을 묘사한다. 조피아에 의해 목적지를 찾았다고 발화되지만, 정작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를 보기 위해 타자의 장소인 베네치아를 찾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아직 어디에도 완전히 정착하지 못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