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볼 때, 탁월하다고 생각되는, 앞만 바라보고 있는 나의 뒤통수를 세게 가격하는 것만 같은 장면들을 보면 웃음이 실실 나올 때가 있다. 나름대로 영화가 제시하는 화면을 조금이나마 독해할 수 있게 된 이후로는 계속 그랬다. 남들은 숨을 죽이고 심각하게 몰입하면서 보는 장면이더라도 그 몰입을 위해 사용된 연출법을 읽게 되면 입을 벌리고 실실 웃으면서 영화를 감상하고는 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런 웃음을 짓기가 어려워졌다. 감독들이 내 뒤통수를 때리지 못할 만큼 영화를 잘 못 만드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좋은 영화들과 훌륭한 장면들을 수없이 만난다. 다만 이제는 그 장면에서의 연출보다는, 그 순간을 만들어야 하는 서사의 기획의도에 머리 아픈 고민을 하며 우울해하고는 하는 것이다.
최근의 <브루탈리스트>가 가장 적절한 예시가 된다. 이 영화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유대인을 주인공으로 한다. 영화는 홀로코스트에서 탈출해 미국으로 도착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관객인 우리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실제로 우리가 그러하듯 그 비극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타자이며, 그들에게 고통을 준 사건을 목격한 적 없이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
이 구조의 어려움은, 영화를 이야기함에 있어서의 어려움이 된다. <브루탈리스트>를 두 번이나 보고 두 번이나 그에 대한 글을 썼지만, 좋아하는 영화를 손꼽을 때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영화가 되었지만, 이 영화를 표현하는 것은 여러 의미로 어렵다. 그러니깐 평소에 아무 생각없이 내뱉는 '너무 좋다.', '아름답다'와 같은 말들을 이 영화에는 가져다 붙일 수 없는 것이다. 극장에 자리한 나는 경험해본 적 없는 그들의 고통을 이해해야 하며, 그들이 상실한 것이 어떤 노력과 헌신을 동반하더라도 결코 재건되기 어려운 것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는 '상실'에만 집중해 생각하게 되며, 그것을 온전히 치유할 방법은 전혀 떠오르지 않아 미쳐버릴 지경이 된다.
역설적으로 영화의 2막 제목은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The hard core of beauty)'이다. 2막은 그것을 다시 발견해서 세상에 제시하고자 하는 주인공의 고뇌를 다룬다. 간간이 주인공이 추구하는 견고한 아름다움이 비추어지는 장면도 나온다. 처음 센터를 건립하기 위해 사전작업을 할 때 햇볕이 아름답게 비추는 땅 위에서 사과를 먹으며 도안을 그리고, 샘물을 마시고 작업을 시작하는 몽타주에서는 그 아름다움의 희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주인공은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데 실패한다. 그것을 아름답지 못한 자신의 세상을 위협하는 행위로 인식하는 타자에 의해서.
<브루탈리스트>를 본 이후로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 이전처럼 감탄을 내뱉고 박수를 쳐가며 작품의 훌륭한 요소들에 기뻐할 수 없게 되었다. 고통받고 답답하고 화가 나게 된다. 관습적인 고전영화의, 주인공이 수많은 고초를 겪지만 결국에는 욕망을 실현하는 데 성공하며 이후로는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식의 서사가 처방전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기도 한다.
답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브루탈리스트>로 미국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에이드리언 브로디의 수상소감을 읽으며 위로를 얻었다. 그는 장황한 이야기를 하다가 음악이 나오자, 자신이 마무리하겠다며 음악을 꺼달라 말하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실제로 유대계기도 한 그는 '전쟁의 여파와 트라우마가 남긴 후유증, 체계적인 억압, 반유대주의와 인종차별, 타자화(Othering) 등이 아닌, 더 건강하고 행복하며 포용적인 세상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한다. 이에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증오를 방치하지 말라는 것이다.'고 덧붙인다. 영화는 3시간 30분 동안 고통받고 억압받는 주인공의 좌절을 보여주지만, 이 영화가 반드시 증오와 폭력에 대한 저항이 될 수 있음을 그들의 영화에 대한 태도를 통해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