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초등학교를 다닐 때면 (주로 걸어가기는 했으나) 아파트 단지 바로 앞에서 506번 마을 버스를 타면 되었다. 지금의 색깔이나 그때의 색깔이나 초록색이라고 해야 할지, 연두색이라고 해야 할지 정확히 모르겠는 그런 색상의 마을 버스였다. 중학교에 다니게 되어서부터는 조금 걸어가 주민센터와 보건소가 함께 있는 건물 앞에서 파란색의 시내버스 2번 또는 10번을 탔다. 그때부터 세계는 조금씩 확장되는 것처럼 보였고, 색깔이 다른 버스를 타고 더 먼 동네로 가는 것은 알게 모르게 또래 아이들 가운데서 흥미로운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조금 더 넓은 세계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돌아오면 내리는 곳은 조금 달랐다. 주민센터 건물 맞은편에는 주유소와 교차로가 있어 차를 댈 곳이 없었기에 정류장이 없었고, 우리의 파란 버스는 좁은 도로를 조금 더 달려나가면 있는 정류장에 차를 세우고 문을 열었다. 버스에서 내리면 <동일방직>이라고 적힌 정류장 이름이 보였고 그곳에서 10분 정도를 걸어가야 집이 있었다.
<동일방직>이라는 정류장의 이름은 언제나 내게 좁은 세계의 것이었다. 정류장의 이름은 내가 그곳에 처음 도착한 순간부터 <동일방직>이었고, 지금 역시 그렇다. 나는 파란 버스와 초록 버스를 갈아타며 가게 된 고등학교에서도, 아예 짐을 싸들고 인천을 떠나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던 대학 생활에서도 동일방직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한 적은 없었다.
학창시절, 버스에서 창밖을 바라보지 않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친구들이 우르르 내리면 화들짝 놀라 내린 그곳은, 지금 생각하면 군사기지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빨간 벽돌로 단단하게 세워진 2m 정도 높이의 담벼락 위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어서 웬만한 사람은 넘어갈 수 없는 요새처럼 꾸몄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많을 나이였음에도 도저히 넘어다볼 수 없는 그곳은 관심 밖의 장소가 되었다. 철조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벽도 있었는데, 다른 곳보다 유독 높은 거기에는 단지 담쟁이 덩굴이 수북하게 자라 철조망을 덮어서 가린 것뿐이었다. 지금 다시 보면 마을버스의 색과 같은 담쟁이 덩굴이 예쁘기도 하고, 철조망의 지뢰를 숨겨주는 함정과도 같이 보여 마음이 아플 때도 있다.
나는 이 모습을 떠올리며 내가 아주 어릴 적 동일방직 인천공장은 이미 문을 닫았던 거구나 생각했지만 오해였다. 인천공장은 2017년 12월 문을 닫았다. 일본의 동양방직이 1933년에 인천에 공장을 만든 지 84년만이며 독립 이후 미군이 접수한 공장을 1955년에 동일방직이 인수한 지 62년만이었다. 내가 파란색 시내버스를 타고 매일같이 그곳 앞 정류장에 내릴 때도 공장은 돌아가고 있었고, 시내버스를 탔다가 마을버스를 타는 등 갈아타면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 문을 닫은 것이다. 부끄럽지만 꽤나 높은 담벼락과 철조망과 그 위를 덮은 담쟁이 때문에 몰랐다. 옆집 이웃이 그곳에서 일하고 친구의 어머니가 그곳에서 일했겠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러니깐 나는 어릴 적 동일방직 공장 앞을 돌아다닐 때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던 것이고, 1978년에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더더욱 몰랐다가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그러니깐 여성 노동자들이 노조의 집행부가 되고, 동일방직은 이를 탄압하고 폭행하고 어용 노조를 세우고, 여성 노동자들은 기숙사에서 뛰어내리고 나체시위를 벌이고, 경찰은 그런 노동자들을 다시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정기총회를 열려던 노동자들에게 남성 노동자들은 똥물을 뿌리고, 동일방직은 다시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블랙리스트를 작성해서 재취업을 막는 그런 일들을 나는 몰랐다.
여전히 인천의 본가로 향하게 되면, <동일방직> 정류장에서 내려 10분 가량을 걸어간다. 전철역에서 집 앞까지 바로 가는 버스는 배차간격이 너무 길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곳 정류장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10분 정도의 시간은 두려울 만큼 길게 느껴져 종종걸음으로 뛰고 싶게까지 한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그 사실을 20대 중반이 될 때까지 몰랐던 무지각에 대한 두려움이다. 갑자기 다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아파트 2층에 살던 어릴 적의 나는 어느 날 고층에 사는 친구 집에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무심코 창문을 봤을 때서야 내가 사는 집이 정말로 바다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바다가 영화나 TV드라마 속의 그것이 아니라, 뻘 냄새가 강하게 나는 잿빛의 갯벌이기에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고 느꼈다.) 그러니깐, 세계는 알려고 하는 만큼 보인다.
꿈을 꿀 시간이 부족해 망상에 자주 빠지는 나는 중학교 교복을 입은 스스로가 <동일방직> 정류장에 내려 그곳 안을 몰래 들여다보는 상상을 한다. 색깔이 다른 버스를 타고 먼 세계로, 지하철을 타고 또 먼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닌, 더 넓은 세계를 들여다봐야 하는 일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