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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와 리얼리즘의 사람들

by joyakdoll


이사를 오고 나니 다른 것은 좋은데 교통이 좋지 않아 외출을 할 때마다 모빌리티 공유 서비스를 이용해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있다. 서울까지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또 수인분당선 전철역에 다다르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환승한다. (물론 안타깝게도 환승요금은 적용되지 않는다.) 자전거를 타면 묘한 만족감을 얻는다. 내가 다리를 저으면 몸이 앞으로 쑥 나아가는 느낌은 매번 신선하다. 걷는 것도 마찬가지지만 자전거는 그보다 두세 배 이상의 효율을 제공한다. 작년 8월에 운전면허학원을 등록하고 아직도 면허를 따지 못한 것이 사실은 자전거가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자전거는 열차의 맞은편에 있다. 근대에서의 산업화와 문명의 발전을 상징한다면, 자전거는 그에 대응하는 1인 교통수단으로 여전히 소시민의 것으로 남아있다. 열차는 작동함으로써 그 규모에 걸맞는 집단, 국가 또는 기업의 이익을 실현시킨다. 자전거는 그 반대편, 또는 하위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전거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작동한다. 열차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효율적으로 출근하기 위해, 또 빠르게 퇴근하기 위해 자전거를 이용한다.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질문대로 틀니, 인공심장, 지팡이와 같은 것들이 인간의 추가된 신체라고 생각했을 때는 사회에서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자전거 또한 노동자의 신체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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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자전거 도둑>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벽보 붙이는 일을 하기 위해 가진 것을 모두 전당포에 내놓아 장만한 자전거를 도둑 맞으면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자전거를 타인에 의해 상실당하고 결국에는 자신이 타인의 자전거를 상실시키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관객에게 질문한다. <자전거 도둑>에서의 자전거는 역시 실존하는 물질로서 '추가된 신체'로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훼손된 신체를, 타인의 신체를 훼손시키는 방식으로 복구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며 또한 무언가를 상실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사조를 정통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다르덴 형제는 <자전거 도둑>을 오마주한다. 감독 본인들이 나고 자란 벨기에의 소도시 세랭을 항상 배경으로 하는 그들의 영화에서는 인물들이 자주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때로는 전동 바이크나 오토바이를 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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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전거 탄 소년>은 직접적으로 <자전거 도둑>의 연장선에 있다. <자전거 탄 소년>의 주인공 소년 시릴은 보육원에서 도망쳤다가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으며, 자신의 자전거마저 팔아버렸음을 확인한다. 시대는 2차 세계대전 직후보다 좋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이곳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에 대하여 자전거 도둑이 된다. (당연히 지금이 2차 세계대전보다 비인륜적이라고 일반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단순히 '추가된 신체' 자전거를 상실시키는 것에 모자라 인격의 정체성을 상실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시릴이 자신을 돌봐주고 싶어하는 사만다와 함께 나란히 자전거를 타는 트래킹 쇼트는 인격을 소유한 개인으로서 자전거를 기능하게끔 할 때의 쾌감(글 맨 앞에서 언급한 것)을 얻게끔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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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탄 소년>의 시릴은, 다르덴 형제의 출세작이자 그들 스스로 첫 작품으로 인정하는 <약속(라 프로메제)>의 이고르를 연상시킨다. 이고르는 시릴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기에 전동 바이크를 타고 다닌다. 시릴은 자전거를 타기 때문에, 그보다 느리게 이동한다. 그러나 직접 발을 굴러야 굴러가는 자전거는 오히려 전동 바이크에 비해 역동적이게 된다. 마치 자신이 자전거를 탈 수 있기 때문에 사람으로 환대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한, 자신의 몸보다 큰 자전거를 힙겹게 밀며 경쾌히 나아가는 시릴의 운전은 다르덴 형제의 망원 렌즈 촬영과 결합되어 멀리서 바라보는 관객들이 그 움직임만큼의 동정심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그 옆에는 강물 방향에 서서 함께 달려주는 사만다가 있다. 무조건적으로 시릴에게 다가가고 그를 돌보려고 하는, 일종의 성인과 같은 사만다는 감독들이 말하고자 하는 특정한 가치를 상징하며 영화에 일관되게 따듯하고 밝은 빛이 들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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