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뒷목육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승은 Nov 07. 2017

태풍 볼라벤이 떠난 자리 ⑨

혼이 나간 피노키오

2012년 태풍은 정말 강력했다.

비바람이 어찌나 셌는지 집 앞 산에

나무들이 통째로 뽑혀 날아갈 것 같았다.

번개도 몇 차례 때렸고

코 앞에서 거대한 나무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모습도 봤다.

사람들이 우산을 들고 거리를 걸어 다니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계속해서 태풍 볼라벤의 피해 상황을 보도했다.

어떤 집은 창문이 깨질까 봐 베란다의 모든 유리창을

테이프로 칭칭 감아 놨고

부산의 유명 호텔에서는 해풍의 엄청난 괴력으로

창문이 깨지는 바람에 투숙객들이 피신하는 대소동이 일어났다.

상점 주인들은 일찌감치 영업을 포기하고 귀가했으며

학교며 유치원이며 어린이집이며 모두 휴원 했다.


그렇다.

호환마마보다도 무서운

휴원이었다.


(울컥)


태풍이 지나간 후...

 

유치원도 안 가요, 어린이집도 안 가요.

놀이터에 나가서 놀지도 못해요.

그야말로 강금이었다.

 

삼시 세 끼도 힘들었지만

두 분이 어지르고, 어지르고

돌아서서 또 어지르고

싸우고 어지르고

울고 어지르고

먹고 어지르고


처음에는 그걸 따라다니며 치우고

먹이고 또 치우고

말리고 치우고

달래고 치우고 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그냥 넋을 상실하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빌어먹을 볼라벤...'하며


그 날 나는 30년 닦을 도를 다 닦았고

오후가 돼서는 내가 신선인지, 신선이 나인지

땅을 안 딛고도 걸어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녁 7시, 나의 지원군 남편이 퇴근했다.

발끝까지 내려오는 나의 다크써클은

백 마디 말보다 강력했다.

오늘은 무조건 외식이다.



밥 달라는 말만 해 봐.  



저녁이 되니 볼라벤도 쉬는지 좀 잠잠해졌다.

그 대신 밖으로 나온 아이들은

말라무트처럼 뛰었다.

뛰고, 뛰고, 또 뛰고

흥분의 꼭짓점을 찍고 있었다.

나 역시 남편이 왔다는 안도감과

바깥공기를 맡는 해방감에 긴장이 풀어졌다.



그렇게 위태위태하던 나의 멘탈이

약간은 고요해지려던

찰나였다.



"아빠, 내일도 태풍이래요."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요?"

"네"

"내일은 괜찮데요."

"아니에요, 선생님이 태풍이라고 오지 말래요."

"선생님한테 전화 왔어요?"

"네"



"피노키오 코가 왜 길어졌는지 알지요?"

"네"

"솔직하게 말해야 돼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집에서는 엄마가 제일 솔직하지요?"

"네, 엄마는 거짓말을 좀 해도 돼요."




이런! 얘네 뭥미?


그렇게 지원군으로 왔던 남편까지 합세하여

어퍼컷을 날렸다.


볼라벤이 떠난 자리

나만 너덜너덜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이러려고 한글을 가르쳤나 ⑧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