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에서 생성형 AI까지
제주도 서귀포시에 있는 본태 박물관은 안도 다다오의 조형미를 느낄 수 있는 건축물과 더불어 전 세계 유명 작가들의 진귀한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2층에 올라서면 벽 한 구석에 홀연히 브라운관의 빛을 뿜어내며 고고하게 서있는 하나의 예술 작품을 볼 수 있다. 바로 미디어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의 ‘TV 첼로’다.
이 작품은 첼로 연주 장면이 방영되는 세 개의 텔레비전을 쌓아 올리고 그 앞에 첼로 현을 달아 만든 하나의 오브제이다. 실제 1964년 백남준은 독일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에서 이 ‘TV 첼로’를 선보여 당시 예술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백남준이 활동했던 1960년대는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고 여겨져 왔던 예술 분야에서 디지털 기술이 접목된 최초의 시대였다. 그전까지는 기술이 인간의 필요에 의해 개발되어 주로 군수 물자 생산과 제품 개발 등 산업 분야에서 쓰였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풍요의 시기를 누리던 1960년대부터 기술에 의한 예술 경험의 확장이 시작된 것이다.
디지털이 예술 영역에서 가장 효과를 발휘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전시일 것이다. 전시는 작가의 창작물을 대중에게 공개할 수 있는 하나의 마켓으로서 작가에게는 명성과 수입의 기회를, 대중들에게는 일상에서 접할 수 없는 경험의 기회를 제공해 왔다. 특히 디지털 전시는 아날로그의 한계를 뛰어넘는 상상력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의 생각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1960년대가 디지털 전시의 시작을 알리는 시대였다면 1980년대에서 1990년대는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함께 예술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시기로, 컴퓨터 아트와 멀티미디어 전시가 본격적으로 부상한 시대였다. 이 시기의 예술은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전통적인 예술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탐구했다. 컴퓨터 아트와 멀티미디어 전시는 단순히 기술을 활용한 예술이 아닌, 기술과 예술의 융합을 통해 인간의 창의성과 상상력을 확장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컴퓨터 아트 예술가 중 한 명인 해럴드 코헨(Harold Cohen)은 컴퓨터 프로그램 'AARON'을 개발하여 컴퓨터가 스스로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AARON은 인간의 개입 없이도 예술 작품을 생성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사용해, 컴퓨터가 창의적 과정에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컴퓨터 아트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켰으며, 예술 창작에서 기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이처럼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걸쳐 멀티미디어 전시가 대두되면서, 예술가들은 단순히 하나의 매체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매체를 결합하여 복합적인 경험을 창출하기 시작했다. 비디오, 음악, 텍스트, 컴퓨터 그래픽, 인터랙티브 요소 등 다양한 매체가 결합된 멀티미디어 전시는 관객에게 다차원적인 감각적 경험을 제공하며, 전통적인 전시 방식의 한계를 넘어섰다.
이후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전시는 대형 미디어 아트로 발전한다. 미디어 아트는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시각적 경험을 제공하는 현대 예술의 한 분야로, 특히 대형 미디어 아트 전시는 관객에게 강렬하고 몰입적인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중에서도 일본의 아티스트 콜렉티브 팀랩(teamLab)은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대표적인 미디어 아트 그룹으로, 그들의 대형 전시는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차원의 예술적 경험을 선사한다.
특히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인 '팀랩 보더리스(teamLab Borderless)' 전시는 2018년 도쿄 오다이바에 개관한 모리 빌딩 디지털 아트 뮤지엄에서 처음 선보였다. 이 전시는 10,000제곱미터에 달하는 공간에 걸쳐 설치된 수많은 디지털 아트 작품으로, 관객이 작품과 상호작용하며 작품 속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몰입형 경험을 제공한다. 전시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팀랩 보더리스는 경계 없는 예술을 지향하며, 관객이 하나의 작품에서 다른 작품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하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흐름은 가상현실과 같은 새로운 기술의 등장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전시의 형태를 더욱 혁신적으로 변화시켰다.
멀티미디어를 활용하던 디지털 전시는 이제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 등 공간의 확장 기술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전시를 창조하고 있다. 이 기술들은 기획자의 창작 과정을 보조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개입 없이도 독창적인 전시를 기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기술이 주도하는 이 새로운 형태는 전통적인 전시의 개념을 재정의하며, 기획자로서 인간의 역할에 대해 깊은 성찰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최대의 현대미술 박람회 중 하나인 아트바젤(Art Basel)은 전통적으로 전 세계의 주요 갤러리와 예술가들을 한자리에 모아 작품을 선보이는 행사로 유명하다. 하지만 2020년, COVID-19 팬데믹의 여파로 물리적 전시가 어려워지자 아트바젤은 혁신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온라인 뷰잉 룸(Online Viewing Rooms, OVR)이다. OVR은 가상현실(VR) 기술을 통해 예술 전시를 디지털 공간으로 옮겨, 전통적인 아트페어를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한 대표적인 사례다. 아트바젤의 OVR은 물리적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전 세계 어디서든 인터넷만 연결되면 누구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디지털 플랫폼이다. 이는 단순한 온라인 갤러리가 아니라, VR 기술을 활용해 실제 전시 공간을 가상으로 재현함으로써, 관람객이 실제 전시장에 있는 것과 같은 몰입감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와 같이 전시 산업은 예술과 산업의 경계를 허물고 기술의 발전에 따라 꾸준히 변화해 왔지만, 최근 몇 년간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생성형 AI의 도입이다. 생성형 AI는 단순히 전시 콘텐츠를 생성하는 도구를 넘어, 전시 플랫폼 자체의 확장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세계 최대의 가전 및 기술 박람회인 CES(Consumer Electronics Show)다. CES는 생성형 AI를 활용해 전시의 경계를 확장하고, 새로운 형태의 플랫폼을 창출함으로써 산업 전시의 미래를 제시하고 있다.
CES 2023에서는 생성형 AI가 관람객의 데이터를 분석해 맞춤형 전시 경험을 제공하는 데 활용되었다. AI는 관람객의 선호도와 행동 패턴을 분석해, 그들에게 가장 관련성이 높은 전시 부스를 추천하고, 개인화된 전시 경로를 제시했다. 이를 통해 각 관람객은 자신에게 최적화된 전시 경험을 할 수 있었으며, 전시 자체가 더 개인화되고 사용자 중심적으로 발전했다.
또한 생성형 AI는 전시회의 글로벌 확장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CES와 같은 대규모 전시는 물리적 공간과 시간의 제약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참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생성형 AI를 활용한 가상 전시 플랫폼은 이러한 제약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CES에서 AI 기반 가상 전시 플랫폼을 통해 물리적 전시회에 참석하지 못한 관람객들도 전시된 제품과 기술에 대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얻고, 가상 환경에서 상호작용할 수 있었다. 이는 전시회가 단순히 특정 장소에서 열리는 행사가 아니라, 전 세계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글로벌 플랫폼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디지털 기술은 전시의 형태를 변화시키고 있으며, 생성형 AI와 같은 혁신 기술은 전시의 글로벌화와 개인화된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전시는 본질적으로 편협하기 쉬운 인간의 생각과 경험의 한계를 극복하고 물리적 장벽을 넘어 교류와 비즈니스의 수단으로 작동했다. 애초의 루브르 박물관 전시가 그러했으며,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아트 바젤이나 CES 등의 산업 전시회 역시 그러하다. 미래의 전시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AI를 비롯한 혁신적 기술들은 전시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며, 인간의 생각과 경험의 경계를 확장시킬 수 있을 때 그 빛을 발할 것이다.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전시는 참여자가 산업과 예술에 더욱 깊이 연결될 수 있도록 돕고, 창의적 사고를 자극하도록 지원한다. 앞으로도 디지털 기술은 전시를 더욱 다차원적으로 발전시켜, 인간 경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