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의 홍수 속에서 진짜배기 에세이 찾기
일기의 홍수 속에서 진짜배기 에세이 찾기
* 이 글은 이동규 작가가 시민기자 자격으로 언론사 '오마이뉴스'에 송고한 기사 글의 원본입니다.
요새 수필들 너무 일기 같지 않나요?
“요즘 에세이 책들, 너무 일기 같지 않나요?”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 여럿이 같이 식사를 하던 중에 누군가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마침 대화의 화제가 ‘책’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살짝 긴장했다. 그의 문제제기가 제법 의미 있는 지적이라고 생각하는 바였지만, 이제껏 화기애애했던 식사 분위기에 비해 다소 도발적이고 공격적인 발제가 아닐까하고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우였다. 동석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반응에 온도 차는 조금씩 있었으나, 대체적으로는 그 말에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덕분에 우리는 식사자리 뿐만 아니라 이후 2차 뒤풀이 자리에서조차 ‘나무에게 미안해하지 않을 책’과 ‘명 수필’의 요건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혹자는 얘기꽃을, 혹자는 설전을 피웠다.
에세이에도 필요한 지성주의
요새는 프로든 아마추어든 수필 작가, 에세이 작가가 넘쳐난다. 서점에서 신간은 매주 홍수 나듯 뿜어 나오고, 네이버 블로그, 네이버 포스트, 다음 브런치, 페이스북 그 외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인터넷 매체에서도 매일 매일 네티즌들의 글 공장은 가동된다. 바야흐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글쓰기 시대다.
나 역시 간혹 서점을 들르거나 웹 서핑을 하다보면 혜안을 얻고 성찰을 하게 되는 에세이들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글쓴이의 감상이나 사변을 토로한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닌 ‘일기’들도 자주 본다.
전자가 주로 몰랐던 사실을 알려주고 배울만한 지식들을 일깨워 줘서 머리와 가슴 모두를 울려주는 에세이들이라면, 후자는 주로 읽는 사람의 마음을 살짝궁 달래줄 뿐 결국 그 사람을 본질적으로 변화시켜 더 나은 인간이 되는 데에는 하등 쓸모가 없는 텍스트들이다.
읽는 이에게 혜안과 성찰을 주는 글과 감상 및 사변의 저장통에 불과한 글은 서로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이런 얘기를 하면 시쳇말로 ‘진지蟲’이라든지 ‘선비 병’에 걸린 사람으로 취급받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내용의 지성력(知性力)’이 그 차이점이라 말하고 싶다.
‘내용의 지성력’은 배움에서 비롯된다. 누군가한테 배운 것이든 혼자 힘으로 익힌 것이든, 많은 것을 보고 읽은 작가는 특정 주제에 대해 글을 쓰더라도 그 주제를 본인이 과거에 배운 것들과 연계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무늬가 찍힌 ‘진짜 생각’을 피력할 줄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사안을 입체적으로 논할 줄 안다.
사안을 다양한 측면으로 고민하는 능력도 생기다보니 자연스레 시각이나 관념도 비범해진다. 그래서 글쓴이의 고민에 깊이가 있고 그 사고력이 돋보이는 글에는 그저 그렇게 남들 다 하는 얘기를 또 하나 숟가락 얹듯 글을 쓰는 작가들의 그것과 질적으로 다른 감동과 깨달음이 존재한다.
가려진 길을 들춰 보여주는 글
요즘은 여행 산문집이 유행이니, 예를 들어 ‘태국의 방콕 여행’에 대해 에세이를 쓴다고 한번 가정해보자.
많은 이들이 아마도 ‘①값싼 물가, ②제법 현대화된 인프라, ③덥고 습한 기후, ④이색적이고 풍부한 먹을거리, ⑤친절한 사람들, ⑥이유는 모르지만 아주 가끔 시내 안에서 벌어지는 소요 등등’을 거론할 것이다.(여기에 자신이 찍은 사진들을 군데군데 적당한 위치에 끼어 넣는 것은 덤이다.)
그리고 자신의 상념을 첨부한다. 독자에게 토닥토닥 거리며 힐링의 느낌을 주는 어투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 모두 그럭저럭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와 같은 응원의 말들을, 그리고 심신을 안정시켜주는 파스텔 톤 컬러들을 야식 치킨마냥 “반반 무 많이”처럼 한데 그럴듯하게 섞어서 말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이런 글은 단순한 정보와 일상의 정서를 제공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곳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 사람이 평균 내외의 머리와 가슴만 갖고 있다면, 누구나 쓸 수 있는 ‘(한낱) 기록물과 소감문’에 불과하다.
읽는 이가 모르던 정보를 알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잠시나마 심리적인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는 점에서는 유용한 글이지만, 독자가 그 글을 읽음으로써 ‘새로운 시각이나 관념’을 얻기는 힘들다.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혜안을 얻거나, 스스로에 대해 성찰을 하는 것은 더더욱 힘들 듯하다.
하지만 ‘①독재 왕권국가의 경제 재분배 체제, ②세계화의 명(明)과 암(暗), ③태국에 관한 지정학 및 지리학, ④음식이 갖는 질병 예방 및 치료의 기능 ⑤서구의 오리엔탈리즘과 문명 위주의 사고방식 ⑥민주화의 성패 요인 등등’에 관해 무엇인가 보고 읽은 바가 있던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그저 그런 기록물이 아니라 통찰력이 배인 여행 산문을 보여줄 수 있다.(게다가 지적으로 조금은 양심이 있는 작가라면, 그동안 ‘가성비 갑(甲)’이라면서 마냥 태국 여행을 찬양했던 자신에 대해 조금은 반성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소위 거인의 어깨, 즉 다른 사람들의 일궈놓은 공신력 있는 지식들 위에서 자신만의 가치관을 투영했기 때문에 이렇듯 개성 있는 세계관을 피력할만한 힘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 글을 읽은 독자 역시 태국과 방콕에 대해 특별하고도 독특한 시각과 관념을 얻게 된다. 유용한 정보와 이국적인 정서를 얻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말이다.
라떼보다는 콜드브루 같은 에세이
학술서도 아닌 일개 수필이나 에세이에 지성력을 요한다는 것이 설핏 억지 같아 보일 수도 있겠다. 사실 에세이는 자칫 사변이나 감정적인 내용으로 치우치기 쉬운 글쓰기 장르다. 명칭도 ‘붓’(筆)을 ‘따라 가는’(隨) 글, 수필(隨筆) 아니겠는가.
그러나 오히려 ‘펜 따라 쓰는 글’이기 때문에 더더욱 내용에 알맹이가 있는 사항들을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붓 따라’ ‘펜 따라’ 쓴다는 말이 ‘메세지에 아무런 가치가 없어도 괜찮다’라는 뜻일 리는 없다. 그저 에세이는 소설이나 논문과 달리, 글을 쓸 때 지켜야할 형식 요건이나 작법 등이 엄밀하지 않아도 좋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꼭 상아탑 속 학자들의 글을 읽자는 뜻은 아니다. 외려 학자들의 글 중에서도 읽을 가치가 전혀 없는 것들이 꽤 많다. 반대로 온·오프라인 상의 숱한 아마추어 작가들을 무시하자는 뜻도 아니다. 아마추어들의 글임에도 불구하고 읽고 나면 머리와 가슴 모두에 울림을 주는 것들도 결코 적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글의 주제의식 자체가 배움에 근간을 뒀느냐 여부다. 사안을 입체적으로 훑고, 평범한 소재도 다양한 각도에서 고찰하려고 노력한 흔적 말이다. 비록 영상과 SNS의 시대라서 짧고 이해하기 쉬운 글들이 각광받고 있다지만, 그래도 문학의 하위범주에 속하는 에세이만큼은 적어도 ‘제대로 된 글’이 갖춰야 할 필요최소한도의 무게감은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굳이 커피에 비유하자면 라떼 같은 수필도 있어야하지만, 그 못지않게 콜드 브루 같은 수필들도 더 많아져야한다. 쓰디쓴 세상살이에 우유처럼 달콤한 말로 고통을 얼른 희석시켜주는 감성치유의 글도 필요하지만, 씁쓸하게 냉기가 서려있는 삶의 진실들을 차분히 한 꺼풀 한 꺼풀씩 이해하고 각성시켜주는 글도 반드시 필요하다.
이제는 그만 좀 나무에게 미안해하길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 못지않게 ‘한국문학은 죽었다’라는 말도 유행이 된지 꽤 오래되었다. 그러나 몰락하고 있는 것은 인문학과 문학만이 아니다. 요즘은 책답지 않은 책을 두고 사람들이 “나무야 미안해!”라면서 장난스럽게 애도를 표한다.
그러나 나는 이 유행어가 출판시장에 대해 독자들이 보내는 경고, 혹은 사망선고인 것만 같아 영 불안하다. “나무야 미안해!”라는 독자들의 우스갯소리에는 ‘계속 이따위 책들을 발간한다면 더 이상 책을 사보지 않겠어!’와 같은 저항의식이 뼈저려있는 느낌이랄까.
나는 가끔 궁금하다. “과연 요즘 사람들 중에서 반(反)지성주의자들이 많아져서 덩달아 내용이 가볍고 감성어린 수필들이 많아진 것일까, 아니면 출판사들이 지성미 떨어지는 책들을 자꾸 찍어낸 탓에 독자들이 그에 쉽게 길들여진 것일까.”하는 궁금증이다.
닭과 달걀의 상관관계를 따지는 문제처럼 무엇이 시초인지 정확히 말하기는 힘들 테다. 독자들이 보기에 “이런 일기는 나도 쓰겠네.”라고 말할 만한 속칭 ‘만만한 에세이’가 지금처럼 계속 양산된다면, 언젠가는 그 반작용으로서 콜드 브루처럼 진중한 맛의 에세이들이 재조명받는 날이 올 수 있을까. 모쪼록 그랬으면 좋겠다. 더 이상 에세이를 읽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나무에게 진심을 다해 미안해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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