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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물병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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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Nov 12. 2017

대화행 열차를 기다리며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제 막 환승 계단을 빠져나왔는데, 정신이 없네요. 백팩 끈을 그러쥐고 뛰어 봅니다. 백팩은 등에 잘 붙어 있는데, 배 쪽이 흔들리네요. 공복에 커피를 많이 마셔서 물이 출렁거리는 거라 거짓말을 해 봅니다. 그렇게 온 마음과 체력을 총동원하여 전철 속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겨우 탔네요. 안심입니다. 마침 자리도 있는걸요. 편히 앉아서 잠깐 잠을 청합니다. 그러고 잠시 후. 주변이 어수선합니다. 궁금해하는 제 귀에 들리는 안내 방송.

     

이번 역은
이 열차의 종착역인
구파발역입니다.

     

아뿔싸. 잘못 탔습니다. 회사에 가려면 대화행을 탔어야 했거든요. 급한 마음에 행선지를 보지 않고 열차를 탄 게 화근입니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 열차에서 내립니다. 귀찮지만 대화행 열차를 기다렸다 타야겠네요.

     

회사를 옮긴 후 아침 풍경입니다. 출근하려면 4호선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야 합니다. 그리고 3호선 열차는 대화행을 타야 하지요. 환승도 귀찮은데 행선지가 다른 열차까지 가려 타야 하니 신경 쓸 일이 많습니다. 처음엔 무조건 빨리 오는 차를 탔습니다. 가다가 내려서 갈아타면 되니까요. 근데 이게 불편하더라고요. 피곤한 아침에 눈을 붙이거나 집중해서 책을 읽으려면 한 번에 목적지까지 가는 편이 나았습니다. 그래서 좀 공을 들여 출근 시간대의 대화행 열차 시간을 외웠습니다. 시간에 맞춰 가면 고민 없이 차를 탈 수 있을 거 같아서. 근데 그러고 나니 차 시간의 압박을 받게 되더군요. 열차가 지연 운행을 하거나 환승 계단에 사람이 많거나 하면 귓가에서 초침 소리가 울리는 듯했습니다. 스트레스. 이 방법도 좋지는 않네요.

     

그래서 지금은 여유 있게 환승역에 도착해서 차분하게 대화행을 기다립니다. 구파발행이 먼저 오면 스크린도어의 시를 읽거나 열차의 오르내리는 승객들을 바라보면서 쿨하게 열차를 보냅니다. 열차 시간의 압박과 중간에 갈아타는 번거로움에서 벗어나게 됐습니다. 10분 일찍 나온 수고 덕에 출근길이 조금은 편해졌어요.

     

살아가는 일에도 이런 여유가 좀 있었으면 좋겠네요. 살다 보면 새로운 상황으로 갈아타야 할 일이 생깁니다. 회사를 그만두거나, 연인과 헤어지거나, 건강이 안 좋아지거나 하는. 그럴 때 바뀐 상황에 제대로 적응하는 것이 필요하죠. 마음이 급하다고 앞뒤 안 가리고 눈앞에 있는 것을 덥석 잡으면 어떻게 될까요? 네, 얼마 안 가서 다시 갈아탈 일이 생길 겁니다. 목적지가 어딘지를 정확하게 알고, 거기까지 갈 수 있는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한 번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잡고자 조바심을 내는 일도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다리는 시간 없이 열차를 바로 갈아타면 좋겠지만, 열차 시간에 목매는 일은 우리 마음을 늘 긴장 속에 머물게 할 테니까요. 더구나 인생의 일들은 열차가 아니어서 시간표도 없지 않습니까? 시골의 간이역처럼 약속된 열차가 도착하는 시간도 들쭉날쭉 하지요. 그러니 여유를 가지고 새로운 상황을 기다려 보시길 권합니다. 그동안은 보지 못했던 주변 세상일들을 구경하고 있다 보면, 조건 좋은 일자리가, 맘에 맞는 연인이, 이전과 같이 건강한 몸 상태가 다시 올 테니까요. 그 시간을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올 겁니다. 출근 시간의 대화행 열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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