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휴대폰 앞을 떠나질 못합니다. 화면을 들여다보고 웃다가 한숨을 쉬는 일을 반복합니다. 이유가 궁금해 물어봤습니다.
“뭘 그렇게 보는 거니?”
“미세먼지 예보.”
모레 소풍을 가는데, 미세먼지 수치가 높으면 소풍이 취소된다고 합니다. 그래서였습니다. 휴대폰 화면을 보며 아들이 일희일비했던 건.
예전의 상황을 떠올려 봅니다. 소풍날 비가 올까 봐 노심초사하던 꼬마가 보이네요. 새 학기가 시작되고부터 기다려오던 소풍이었습니다. 그래서 소풍 전날이면 어김없이 잠을 설치곤 했었죠. 그래도 그때는 곧 비가 올 것처럼 흐려도 당장 비가 내리지 않으면 소풍을 갔었습니다. 중학생이던 어느 소풍날엔 오후에 비가 내려 옷이 다 젖은 채로 친구들과 뛰어놀았던 기억도 납니다. 비가 와도, 온몸이 흠뻑 젖어도 마냥 즐거웠던 기억. 소풍은 언제나 그렇게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아들의 소풍은 결국 취소되었습니다. 클래스팅과 카톡을 통해 취소 결정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한 아들은 끝내 울고 말았습니다. 쨍쨍하게 해가 비쳐도 소풍을 갈 수 없는 아이들.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놀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빼앗긴 아이들. 미세먼지라는 족쇄로 아이들의 발목을 묶은 죄를 지은 어른이어서 미안하기만 합니다.
우리 자랄 때만 같았어도 그렇게 아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집 대문만 열고 나가도 친구들 몇몇은 만나 놀 수 있었으니까요. 해 질 녘까지 뛰어놀다가 담 너머에서 이름을 부르는 엄마의 고함소리에 집으로 돌아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엄마들끼리 약속을 하거나 며칠 전부터 엄마들의 허락을 얻고 나서야 겨우 만나 놀 수 있더군요. 그러고도 모이면 각자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는 아이들의 서글픈 모습. 낯설고도 아쉬운 풍경입니다.
얼마 전 신문 기사를 보니 KAIST에서 ‘2031 비전 선포식’을 하며 가치 중심 교육에 대해 강조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비전 달성을 위한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기존 창의(Creativity), 도전(Challenge)과 더불어 ‘배려(Caring)’를 추가해서 발표했다고 하네요. 앞으로 창의력을 가지고, 세계와 역사 발전에 이바지하며 지구촌의 어려운 이웃을 배려하는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의와 도전, 그리고 배려.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요? 제 경험으로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저런 것들을 배웠습니다. 장난감이 풍족하지 않은 시절. 주변의 돌멩이, 나뭇가지 하나만 있어도 놀이를 만들어 냈었습니다. 놀이를 하면서는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 냈고, 공정한 테두리 안에서 경쟁하며 이기고 지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아직 해 보지 않은 일들에 도전하게 되었고, 상대방과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혹시라도 주변에 나보다 못한 친구가 있거나 뒤처져 있는 우리 편이 있으면 함께 즐기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챙기기도 하면서 말이죠.
골목길과 놀이터에 아이들이 사라지면서 창의니 도전이니 배려니 하는 덕목들도 스러져 갔나 봅니다. 인공지능과 로봇을 논하는 시대에 다시 강조되고 있는 걸 보면. 최고의 대학에서 강조한 능력이니만큼 저런 것들을 길러 준다는 사교육이 또 생기지나 않을까 궁금해지네요. 운동보다는 약으로 건강을 유지하려는 세태처럼 씁쓸합니다.
이런 세상을 만든 아빠를 탓하지는 않을까? 미안한 마음으로 아들의 동정을 살핍니다. 카톡의 상태 메시지가 바뀌어 있네요. 중국을 원망하는 문구를 써 놓았습니다. 아들은 결국 이 사태의 주범을 미세먼지로 세운 모양입니다. 계절이 좀 지나면 미세먼지가 걷히겠죠? 그때도 아들이 행복하지 않은 세상이라면 화살이 어른인 제게도 돌아올지 모르겠습니다. 그 화살을 피하려면 아들과 좀 더 몸과 마음으로 부대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여기서 더 망가지지 않게라도 보살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