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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May 31. 2019

기생충

그들은 왜 기립박수를 쳤을까?

천둥 번개와 함께 쏟아지는 비. 어떤 이에게는 미세먼지를 가시게 하는 ‘고마운 비님’이고, 누군가에게는 기거할 곳을 수장(水葬)해 버린 ‘망할 놈의 비’이다. 같은 대상을 두고 보이는 상극의 반응. 그 양 끝에 존재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영화 <기생충>에 담겨 있다.     


반지하의 사람들

집안에서 길거리가 내다보이는 곳. 햇볕이 들어오기는 하지만, 지하 습기에 곰팡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곳. 음지(陰地)에 가깝지만 양지(陽地)를 꿈꿀 수 있는 곳. 지상으로 갈 돈은 없지만, 지하로 묻히기는 싫은 심리적 저항선 위에 걸쳐 있는 곳. 그곳 반지하에 기택(송강호 분)의 가족이 산다.

기택의 가족에게는 특별한 대책이 없어 보인다. 그들은 가정경제의 위기를 타개할 자구책을 고민하지 않는다. 다만, 하루하루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기민하게 대응한다. 그러면서 양심과 도덕심은 사라지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의지만 선명해진다. 이러한 모습은 기생충의 진화 과정과 유사하다.      

기생충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아마도 자유생활을 하는 생물체 중 일부가 우리 몸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들이 우리 몸에 일부러 들어왔을 수도 있고, 우리가 음식을 먹는 과정에서 우연히 들어온 것일 수도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자유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회의를 느꼈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는 것도 힘들고, 자신을 노리는 다른 생물체로부터 도망 다니는 것도 이제 지겨웠다. 그런데 사람의 몸속은 어둡고 침침하긴 하지만 최소한 굶어 죽을 염려는 없다. 그 생물체는 혁명적인 생각을 한다. “그냥 여기서 이대로 살면 어떨까?”

- ‘비열할 수는 있어도 탐욕스럽지는 않다’ (“기생충”, 서민)

박 사장(이선균 분) 집안에 기생하게 된 기택의 가족. 이제 그들의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다. 숙주의 환경에 맞춰 생존만을 생각하는 그들. 그들의 변모는 불경기에 먹고사는 일이 막막해진 우리들 대다수가 오로지 생계에 이끌려 다니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 영화는 불편하다. 기택 가족의 염치없고 천박한 ‘기생 일기’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 속 우리들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에. 마치 격식 있는 자리에서 구멍 난 양말을 내보이듯 낯 뜨겁고 불편하다.

여기에 불편한 진실 하나가 더 있다. 기생충의 정의를 보면, 서로 다른 종의 생물체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기준이 있다. 기택의 가족이 박 사장 집안의 기생충이라면,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반지하의 사람들은 언덕 집의 사람들과 서로 다른 종임을.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둘 사이에는 공생(共生)보다는 기생(寄生) 관계가 형성되고 있음을.     


언덕 집의 사람들

유명 건축가가 지은 저택. 그곳엔 푸르고 넓은 잔디밭이 있고, 그 위에는 반지하의 세상이 수장될 만큼의 비가 내려도 빗물이 스미지 않는 미제 인디언 텐트가 있다. 그 완벽한 곳의 주인 박 사장. 그는 글로벌 IT 기업의 대표이다.

IT 기업의 디지털 세상에서는 사람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자동화된 프로그램과 플랫폼을 통해 잠자는 동안에도 수익이 창출된다. 주인공은 기술이 되고, 노동자의 수고는 노임 단가표의 숫자로 치환된다. 박 사장에게 사람들은 용도에 따른 테이블의 기준선에 따라 평가된다. 그 선을 넘어서 본인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끼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가차 없이 상대를 내치지만, 선을 넘지 않으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숨은 채로 자기 먹을 것만 챙겨 먹겠노라고 분수를 지키는 기생충에게는 기거하기 좋은 조건의 숙주이다.

연교(조여정 분)는 ‘믿음의 벨트’를 신봉하는 인물이다. 그들만의 리그 멤버들이 소개하는 것이라면 큰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복잡하게 들여다보고 꼼꼼하게 따져 보는 자기 주관이 결여된 아주 ‘심플한’ 존재이다. 그런 그녀에게 간택되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믿음의 벨트’ 안으로 침투해야 한다. 기택의 가족이 신분을 속이고 경력을 위조하고 타인을 비방하면서까지 언덕의 집으로 들어선 것처럼. 현실 속에서 연교와 같은 부자들이 많아지면서 학연, 지연, 혈연 등등의 줄을 대기 위해 열심인 우리들. 기생충의 일면이 발견되는 순간, 불편한 마음이 든다.

언덕 집에 사는 박 사장과 연교(조여정 분)는 친절하다. 상대가 선을 넘지만 않으면, 친절함을 베푸는 아주 심플한 성격의 사람들이다. 충숙(장혜진 분)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이 친절한 이유는 돈이 많기 때문이다. 친절함을 기생충이 서식하기 좋은 정도로 해석해 본다면 돈(자본)이야말로 기생충이 평생 살아갈 집인 종숙주(終宿主)라 할 만하다. 박 사장 등의 자본가는 잠시 기생하는 중간숙주에 불과하기 때문에 기택은 박 사장을 해할 수 있었다. 기생충은 기생의 터전인 숙주를 해하지 않는다.

결국 언덕 집 사람들의 파국과 교체는 이 시대의 진짜 숙주가 누구인지를 드러낸다. 잘 지어진 건축물처럼 치밀하고 견고한 자본주의 시스템. 그 안에서 우리들은 자본주의가 내어주는 양식을 일용하며 있는 듯 없는 듯 살아남아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강의 깊이, 길고 긴 계단

반지하의 사람들과 언덕 집의 사람들 사이에는 길고 긴 계단이 있다. 이 계단은 기택의 가족이 아래로 내려가는 장면에서 주로 등장한다. 계단 위에서 그들은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빗물을 쫄딱 뒤집어쓴다. 언덕 집에서 반지하의 집으로 돌아갈 때의 상실감만큼 황폐한 길이다. 거센 빗물까지 콸콸 실어 나르는 아주 무정한 내리막길이다.

이러한 계단은, 외면적인 가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의 상승은 필연적으로 내면적인 도덕성에 근거한 삶의 황폐함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기택 가족이 물질적으로 상승하는 것에 반비례하여 도덕적으로 추락하고 있는 작품의 구조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를 형상화하면서 이 시대의 일상적 삶의 혼돈상을 반영하고 있다. 계단은 혼돈스러운 삶에서 느낄 수 있는 도덕적 타락의 깊이와 양심의 충격을 촘촘하고 험난한 계단의 깊이로 시각화하고 있다.     



칸 영화제의 시사회장에서 8분간 기립박수를 친 참석자들. 그들은 왜 박수를 쳤을까? 주요 인물들의 눈이 가려져 있는 포스터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익명의 인물로 처리된 자리에 우리 중 누구의 삶이라도 대입 가능하기에 전 세계의 사람들이 공감의 박수를 보낸 것이 아닐까? 자생(自生)의 길로 들어서는 입구는 날로 좁아지고, 일부의 사람들만이 부를 독점하는 세상. 그 자본주의의 시스템 하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기생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 자신도 기생하는 처지면서 약자의 기회와 먹이를 빼앗는 비열한 모습.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생태학적 발견에 보내는 경탄의 박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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