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종현, <사람과 고기>
찬밥 한 덩어리도
뻘건 희망 한 조각씩
척척 걸쳐 뜨겁게
나눠먹던 때가 있었다.
채 채워지기도 전에
짐짓 부른 체 서로 먼저
숟가락을 양보하며
남의 입에 들어가는 밥에
내 배가 불러지며
힘이 솟던 때가 있었다.
밥을 같이 한다는 건
삶을 같이 한다는 것.
이제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은
누구도 삶을 같이 하려
하지 않는다.
나눌 희망도
서로 힘돋우워
함께 할 삶도 없이,
단지 배만 채우기 위해
혼자 밥먹는 세상
밥맛 없다.
참 살맛 없다.
- 오인태, <혼자 먹는 밥>
시인은 노래한다. ‘밥을 같이 한다는 건 삶을 같이 한다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제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이 ‘단지 배만 채우기 위해 혼자 밥 먹는 세상’은 ‘밥맛’도 ‘살맛’도 없다고 한탄한다.
양종현 감독의 <사람과 고기>는 바로 이 시인이 진단하는 ‘살맛 없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묻는다. 이토록 밥맛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맛’을 되찾을 것인가.
영화의 핵심 플롯은 단순하면서도 도발적이다. 폐지를 주우며 홀로 생계를 이어가는 형준(박근형 분)이 비슷한 처지에서 외롭게 살아가던 우식(장용 분)과 화진(예수정 분)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이들은 ‘돈 있어야 먹을 수 있고 혼자 먹기엔 서러운 음식’인 ‘고기’를 먹기 위해 의기투합하여, 식당에서 식사 후 돈을 내지 않고 달아나는 이른바 ‘무전취식’을 감행한다.
‘고기’는 오인태 시인의 ‘희망 한 조각’과도 같다. 혼자 먹기엔 망설여지는 귀한 것이자, 함께 불판 앞에 둘러앉아 ‘삶을 같이 하는’ 의례를 위한 강력한 매개체다. 이들의 무전취식은 단순한 식사 해결을 넘어 세 노인이 마침내 살아있음을 느끼고 세상과 연결되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여정이 된다.
세 노인은 ‘청춘’의 사전적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청춘’이 단지 나이가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치열한 시간이자 무언가를 향한 ‘열망’과 ‘의지’라면 어떨까. 영화 속 세 노인은 그 누구보다 격렬하게 ‘청춘’을 앓고 있다. 그들은 활동하고 싶고,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어 한다. ‘고기’는 그 열망의 상징이다.
하지만 이들의 ‘푸른 봄’은 ‘경제적 빈곤’이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혀 좌절된다. 마트의 정육 코너에서 고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다가, 결국 우유 한 팩을 사서 고양이와 나눠 먹는 우식의 모습. 이는 오인태 시인이 말한 ‘뻘건 희망’을 나누는 밥이 아닌, 단지 배만 채우기 위한 ‘살맛 없는’ 식사다. 이는 열망은 있으나 수단이 박탈당한 ‘좌절된 청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 영화의 가장 아픈 장면 중 하나다.
우리는 이처럼 힘든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할까. 영화 속 인물들의 시선은 ‘견뎌’라는 차가운 주문에 가깝다. ‘견뎌.’ 참 조용한 말이다. 하지만 묵직하고 서늘하다. 이 말은 지금이 고통스럽다는 현실을 정확히 꿰뚫어 본다. 그리고 요구한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그냥 그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라.” 그것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간을 홀로 버티라는, 희망이 아닌 인내의 강요이다. 도움의 손길이 빠진, 가장 외로운 명령이다. 폐지를 줍는 것 외에 생계 방법이 없는 이들에게 사회는 그저 그 상태를 묵묵히 ‘견디라’고 말할 뿐이다.
사회가 이들에게 가하는 폭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견디라’는 방임의 반대편에는, ‘나이가 들었으면 모범을 보여야지’라는 차가운 꾸짖음이 있다. 영화는 노인들의 무전취식 같은 비행을 힐난하는 목소리를 통해 “알아서 조용히, 문제 되지 않게 죽을 날만 기다리라”는 사회의 암묵적인 주문을 드러낸다.
영화는 이처럼 대책 없고 냉정한 사회의 단면을 한 에피소드를 통해 정확히 꼬집는다. 봉사단체 사람들이 우식에게 ‘수의’를 선물하고, 손가락하트를 만들며 밝은 표정으로 인증샷을 찍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노인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사회는 선의를 베푸는 듯하지만, 그 행동의 기저에는 ‘노인은 곧 죽을 존재’이며 ‘죽음을 조용히 준비해야 한다’는 편견이 깔려있다.
하지만 영화 속 노인들은 이런 사회의 단정에 저항한다. 형준의 친구는 이 ‘조용한 기다림’을 거부한다. 그는 자신의 장례비를 모아둔 채, 굶어 죽는 방식으로 삶의 마지막 의지를 표명한다. 이는 죽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을 거부하는 가장 적극적인 저항이며, 형준은 그런 친구의 선택을 지지한다.
주인공 삼인방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죽음에 대해 초연하다. 모두가 겪어야 할 일 정도로 여기며 과민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정작 그들이 집중하는 것은 다가올 ‘죽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삶’이다. 그들은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라, ‘현재를 즐기는’ 존재로서 ‘청춘’의 자세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 삼인방에게 필요한 것은 ‘견디라’는 외로운 명령도, ‘조용히 죽으라’는 냉소적인 방임도 아니었다. 그들은 ‘견디는’ 대신, ‘고기’를 훔치기로 한다.
이 유쾌 발칙 뭉클한 범죄 행위는 사회가 제공하지 못하는 삶의 활력이자 가슴 뛰어 본 적 없는 이들이 ‘살아 있음’을 획득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음식값을 내지 않고 달아나는 그들의 질주는 ‘나이가 들었으면 나잇값이나 하라’는 사회의 무례한 꾸짖음에 대한 가장 유쾌하고도 슬픈 저항이다.
물론, 나이에 맞지 않게 무전취식이나 하는 이들을 그저 추잡한 범죄자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비행’은 단순한 ‘추잡함’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서로 친해지면서,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신을 증명하고 있다. 영화는 이들이 스스로의 가장 깊은 치부가 되는 개인사를 고백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우식은 이루지 못한 첫사랑과의 이별을, 화진은 자신이 사업가의 첩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형준은 가정에서 ‘쓰레기 같은 난봉꾼’이었음을 고백한다.
이 글의 서두에서 청춘을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치열한 시간이라 정의했다. 이들은 고통스러운 과거를 직시하고 고백함으로써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고, 또 남은 삶 속에서 그 답을 찾아가고 있는 진정한 ‘청춘’이다. 이런 이들을 단순히 무전취식이라는 행위 하나로 추잡한 범죄자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이들의 모험은 단순히 고기를 먹고 싶다는 생존 본능을 넘어선다. 그것은 ‘삶의 긴장성, 오랜만의 두근거림’을 되찾고 싶은 열망이다. “살맛도 나고 죽을 뻔도 했지”라는 화진의 대사처럼 위험을 감수하며 살아 있음을 체감하는 ‘청춘’의 다른 이름이다. 양종현 감독이 “두렵고 우울한 노인 얘기 말고, 희망적인 노인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을 때, 그 희망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노년에도 ‘욕망’이 살아 숨 쉬고 있으며, ‘모험’을 꿈꿀 권리가 있다는 선언이다.
영화는 묻는다. “왜 노인은 모험을 꿈꾸면 안 되는가”, “왜 늙었다는 이유로 조용히 있어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노인을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로 단정 짓는 시선을 거둬야 한다. 그리고 청춘을 원하는 노인들의 상황을, 그들의 ‘의지’와 ‘열망’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결국 <사람과 고기>가 말하는 것은 ‘고기’가 아니라 ‘사람’이다. 우식은 고백한다. “형님이랑 여사님이랑 고기 먹으러 다닐 때가 제일 좋았어.” ‘고기’가 아니라 ‘함께 있는 시간’이 소중했다는 고백이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경제적 안정이나 복지제도를 넘어, ‘함께 밥 먹을 사람’과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진정한 공감은 ‘견디라’며 고통을 홀로 감내하게 만드는 외로운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명령이 아닌, 그들에게 ‘둘러앉은 밥상’의 한자리를 묵묵히 내어주는 구체적인 ‘행동’이다.
오인태 시인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삶을 같이 하는’ 그 밥상, 불판 앞에 모여 ‘뻘건 희망’ 같은 고기를 굽는 그 의례에 이들을 기꺼이 동참시키는 것. 그것이 ‘살맛 없는’ 이 세상에서 이 영화가 우리에게 권하는 응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