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산 게이 <헝거>
키 190센티미터에 261킬로그램의 20대 후반의 여성. 만약 길을 가다 그런 여성을 마주치면 어떤 생각이 들까? 젊은 사람이 너무 게으른 거 아니야? 운동을 좀 하지, 스스로도 힘들지 않을까? 왜 가족들은 저 지경이 되도록 그녀를 내버려뒀을까? 그런데 만약 그녀가 스스로 선택해서 일부러 이 지경이 되도록 몸을 혹사시킨 거라면 어떨까? 아니, 이 세상을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한 생존의 방편으로 일부러 살을 찌우고 몸을 거대하게 만든 것이라면?
록산 게이. 문화 비평가이자 퍼듀대학교 문학 교수, 그리고 페미니즘의 대중적 열풍을 몰고 온 <나쁜 페미니스트>의 저자는 거구의 몸을 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190센티미터에 261킬로그램의 몸이 바로 록산 게이의 몸이다.
어릴 적 그녀는 여느 집 아이들처럼 작고, 예뻤고, 사랑스러웠다. 또 여느 여자아이들처럼 치마 입기를 좋아했고, 머리에 핀을 꽂았으며,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다녔다. 그런데 열두 살, 그 날 이후로 그녀는 그 모든 것을 하지 않았다. 치마를 안 입기 시작했고, 장신구를 하지 않았고, 머리는 커트로 잘라버렸다. 그리고 작았던 자신의 몸을 거구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날은 열두 살 소녀가 친구라고 믿었던 소년에게 무참히 짓밟힌 날이었다. 성폭행을 당한 날이었다.
어떤 소년들이 나를 파괴했고 나는 파괴 현장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그와 같은 폭력을 또다시 겪으면 살 수가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았고
나의 몸이 역겨워지면 남자들을 멀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열심히 먹었다.
어린 나이에도 뚱뚱하면 남자들에게 매력적이지 않다고 이해했고,
그들이 경멸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가 된다는 걸 이해했고,
나는 그들의 경멸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_ <헝거>, 32쪽
록산 게이는 <헝거>를 통해 자신의 몸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녀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 성폭행의 기억을 꺼낸다. 가해자는 친구라고 믿었던, 어쩌면 그녀의 인생에서 첫 사랑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남학생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 아이를 좋아했고, 그래서 그 오두막집에 따라갔기에 그 일이 벌어졌다 생각했다. 보통의 피해자들처럼 그녀 역시 자신을 탓했다. 부끄러워서, 수치스러워서 친구도, 선생님도, 가족에게도 침묵했다. 대신 그녀 스스로 방어의 방법을 찾았다. 먹고 또 먹어 거구의 몸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자기 몸이 혐오스러워지면 그 어떤 남성도 가까이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누군가에게는 한 번의 실수, 어쩌면 기억 속 저 편에 묻혀 생각도 나지 않는 일들을 다른 누군가는 평생 기억하며 살아간다. 록산 게이처럼 자신의 몸을 학대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극단의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삶은 분노, 증오, 후회, 좌절의 연속이고 그 속에서 매일을 버텨내야 하는 생존의 문제이다.
학대, 테러, 학살, 전쟁 등으로 물리적, 정신적 외상을 입었지만 복수 대신 용서를 결심한 46인의 이야기를 담은 <나는 너를 용서하기로 했다>에는 피해자들이 사건을 겪은 이후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가 더욱 절절하게 그려져 있다. 열네 살 아들을 살인 사건으로 잃은 부모, 아버지로의 폭행으로 어머니를 잃어야만 했던 딸, 가장 따르던 어른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폭력적인 삶을 살아온 남자의 이야기까지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십수 년을 그들은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며 살아왔다.
이 책을 통해 용기 내 자신의 이야기를 한 매들린 블랙에게도 삶은 고통이었다. 열세 살 때 친구 엄마의 아파트에서 10대 두 명에게 참혹한 성폭행을 당했던 그녀는 스스로를 탓하며 살아왔다. 왜 부모의 허락도 없이 그 아파트에 갔는지, 왜 술을 마셨는지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 같았다.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진 그녀는 자신의 몸을 막 대하기 시작했고 마약에도 손을 댔다. 자살 기도도 했다. 그런 그녀가 ‘용서’의 방법을 선택한 건 ‘살기 위해서’였다. 심리치료를 받던 중 그녀는 자신이 미쳐버리지 않으려면 성폭행 사실을 인정하고, 그 사건을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용서란 절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단어라 생각했지만, 생존의 문제에 다다르자 내려놓기가 가능해졌다.
이 책에 등장한 사람들은 모두 용서의 길을 선택했지만 그건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용서와 다르다. 남은 생을 살아가기 위한 생존의 방식이었으니깐. 그렇게 놓아버리지 않으면 영원히 그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니깐.
비극을 막을 수 있는 절대적인 방법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야속하게도 우리 주변에는 계속해 피해자들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다음으로 고민하고 노력해야 하는 건 그 피해자들이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 극단의 선택을 하지 않게 하고, 다시 삶의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더 열린 마음으로 포용하고 진심으로 그들의 고통을 이해해주는 거 아닐까. 이들의 용기 있는 고백이 헛되이 흘러가지 않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