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나라>
남자는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외모를 가꾸어야 하며, 아내가 사회생활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내조를 하고, 여자의 힘과 권위에 의문을 갖거나 감히 도전을 해서는 안 되는 사회. 성폭행을 당한 수치심도, 남녀차별의 부당함도 모두 남자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 되어버린 사회. 바로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에 나오는 이야기다.
페미니즘의 고전이라 불리는 <이갈리아의 딸들>은 성 역할이 완전히 뒤바뀐 사회를 그리며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성 역할에 관한 고정관념을 깼다. 남자가 아닌 여성이 사회의 중심이고, 모계 중심의 가모장사회의 이야기. 하지만 논란도 있었다. 극단적인 상황 설정과, 그래서 설득력이 부족한 부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닌 실제, 지금 이 순간에도 모계사회로 살아가는 곳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중국 윈난성 루구호 주변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쒀족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정말 사는 동안 이렇게 나를 나 자신으로 받아들여주는 환경에서
편안하게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여성인 나를 그저 나로 존재하게끔 하고,
그럴 수 있도록 북돋아 주고,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세계에서
포근하게 보호받는 기분을 느낀다. 과장이 아니라, 목소리를 내거나 어떤 행동을 제안하는 순간에
나는 단 한 번도 의견을 묵살당한 적이 없었다.
_ <어머니의 나라> 92쪽
추 와이홍. 그녀는 싱가포르 최대 로펌이자 세계 최대 로펌 회사의 고문 변호사로 소위 잘나가는 변호사였다. 주말은 물론 하루 15시간씩 일하는 워커 홀릭이었으며, 그녀가 이끄는 팀의 실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어쩌면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커리어를 가진 그녀였지만 싱글여성인 그녀의 직장생활은 쉽지 않았다. 남성이 많은 로펌 조직은 그녀를 은근히 배제했고, 파트너사와의 미팅에서도 여성들의 편을 들다 불편해질 때가 많았다. 사직서를 쓸 때 조차도 남성 직장 상사는 ‘개인적인 이유’가 아닌 ‘가족 문제’로 퇴직 사유를 쓰라는 종용을 받았다.
그렇게 회사를 그만둔 추 와이홍이 떠난 곳은 중국 윈난성에 위치한 모쒀족 마을이었다. 남아선호 사상이 짙고 가부장적인 중국에서 모계사회를 지키고 살아가는 모쒀족. 모쒀족은 가모장인 할머니, 할머니의 딸과 아들, 딸이 낳은 손주들이 이룬 가족이 가정의 기본 단위인 사회다. 여성들은 성년이 되면 화려한 의식을 치르고 혼자만의 방 ‘꽃방’을 쓰게 되며, 여성은 아이를 가질 수 있지만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며, 남자들 역시 자기 아이를 찾으려하지 않는다.
아이의 이름에도 성을 담지 않는다. 마을의 무당이 작명 의식을 거쳐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는데 성별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여자와 남자가 이름이 같은 경우가 많다. 이 사회에서는 여성을 새로운 생명을 탄생케 하는 힘의 원천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여성을 배려하고 보호한다. 농가와 농장 관리도 여성의 몫이다. 낫을 들고 농사일을 하고, 집안의 식사를 책임졌다. 여성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장의 모든 역할을 담당했다.
중국계 싱가포르인인 추 와이홍은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사업차 들르는 항구도시마다 애인을 두었고, 어머니는 그 모든 상황을 견디며 살았다. 그녀가 일했던 로펌 사회는 전형적인 남성사회로 여성을 은근히 배제하며 스스로 걸어나갈 것을 종용했다. 그런 그녀가 만난 모쒀족은 충격 자체였다. 모든 것이 낯설었고, 모든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집을 짓고 6년간 싱가포르를 오가며 살게 되며 그녀는 모쒀족 사회에서 편안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언가를 강요받는 기분을 느끼지도, 잘못된 신념에 맞서 핏대를 세울 일도 없었다. 포근했고, 보호받는 기분을 느꼈다.
<어머니의 나라>는 우리도 모쒀족처럼 살자고 말 하는 책이 아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자는 것이다. 이렇게도 살아갈 수 있구나,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 생각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자유롭고 평등한 어머니의 나라에서 우리는 가능성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