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와 이야기, 그리고 프로덕트
사람은 이야기 형식일 때 가장 정보 처리를 잘 한다고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야기는 좋아했지만 숫자에는 알 수 없는 거부감이 있었는데, 인간이 가진 다채로운 이야기를 숫자가 납작하고 단순하게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 속 한 구절이 이 두 영역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상반된 인식을 보여준다.
만약 당신이 어른들에게 “장밋빛 벽돌로 지은 예쁜 집을 보았어요. 창문틀 위엔 제라늄 화분이 놓여 있었고, 지붕 위로는 비둘기들이 날고 있었어요...”라고 말한다면 어른들은 그 집을 상상하지 못한다. 대신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 라고 어른들에게 말하면 모두들 “정말 멋진 집이겠구나!”라며 감탄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인식을 송두리째 바꾸게 되었다. 데이터로 의사 결정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회사에 다니면서부터다. 나는 이 회사에서 디자인이라는 주관적이고 감각적인 대상을 숫자로 치환해 데이터로 평가하는 법을 배웠고, 스토리밖에 없던 내 뇌에 숫자를 기반으로 한 관점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숫자와 데이터가 낯설었지만, 비즈니스상으로 숫자를 바탕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우선 협업에 굉장히 용이했다. 팀원들에게 내 디자인 의도를 설명하고 설득하는 데 데이터만큼 확실하고 편한 도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내가 디자인하기 전후로 숫자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보고 숫자 이면의 의미를 해석하는 능력을 키우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넓힐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데이터와 친한 디자이너가 되고 나서 훨씬 풍부하고 설득력있는 디자인을 할 수 있었다.
스토리와 숫자가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하며 함께 할 때 더 큰 임팩트와 영향력을 낼 수 있듯이, 프로덕트도 데이터와 그것을 기반으로 한 내러티브가 있어야만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행동을 이끌어낼 수 있다.
프로덕트 메이커로서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늘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메시지를 만들고, 그것이 제품이나 서비스로 현실화되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행동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곳을 향해 이야기라는 연을 띄우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여러분께 이야기를 하나 해 줄게요.”
하지만 이야기라는 연을 현실에 단단하게 메어두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만드는 데에는 숫자라는 줄이 반드시 필요하다. 줄에 연결되지 않은 연은 하늘 높이 날아가 버려서 결국 우리 시야에서 벗어나버리기 때문이다.
전에는 숫자가 이야기의 풍부함을 납작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숫자는 이야기라는 연을 더 멋지고 자유롭게 비행할 수 있게 지탱해주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