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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 Oct 06. 2022

수동적 삶_아이가 아픈 날의  

인생 리모델링, 될까? 13

아이가 아팠다

옅은 콧물로 시작된 아이의 감기가

피곤한 주말을 보낸 후 심한 열감기가 되었다

아이는 등원하지 못했고

나의 일정은 어그러졌다

내가 온종일 돌볼 수 있다는

전업주부의 안도감 뒤로

예고 없이 빼앗긴 나의 시간에 대해 

억울함이 솟는다




삶을 내 손안에 꼭 쥐고 살아가고 싶었다

불안을 잠식시키고  

허한 마음을 스스로 채우며

그렇게 살 수 있기를 바랐다

 

당연히 나의 이상은 날마다 현실로 곤두박질쳤다

 

이상을 이상으로 두고 훼손하지 않으며 살 수 있었던 날들도 있다

나 하나 책임지고 살면 되었던 시간들 속에서는

적어도 내 손안에 쥐고 통제하며 살 수 있는 시간과 공간들이 일부 존재했다

 

이제는 아니다

움켜쥘수록 더 세차게 빠져나가고

그리하여 나는 더 세게 움켜쥐려 했다

힘을 쓸수록 무력해졌던 그 시간들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다면

단번에 우울증 판정이 내려질지도 모르겠다


나는 조금 힘을 빼야 했다

아니 힘이 빠졌다

내가 태어나려고 태어난 게 아니다

그러니 엄연히 시작부터 그저 난 수동적인 존재였을 뿐이다

무슨 애를 쓰더라도 결국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지 못하고 결국 모든 사람이 가는 마지막 길로 가게 될 터인데

나는 내가 능동적으로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착각 속에 꽤 오랜 시간 빠져 있었다

그 잡히지 않는 시간들은 나를 무력하고 재미없고 그러다가 가끔 한 번씩 삶에 대해 신경질이 나는 사람으로

살게 만들었다


이렇게 살아가는 나였기에

아이가 아픈 날, 나는 아이를 향한 걱정과 안쓰러움 뒤에서 신경질 나는 나의 마음과 숨은 투쟁을 이중적으로 치러야 했다

무너진 나의 시간, 어긋난 계획을 받아들이는 게 힘들었다



큰아이와 남편을 보내고 작은 아이와 단 둘이 남겨졌다

나의 시간에 함께 남겨진 아픈 딸

나는 평소에 켜지 않는 TV를 켜고 아침밥을 느긋하게 늘어지게 먹었다

채널을 돌려가며 요즘 홈쇼핑에선 무슨 물건을 파는지

TV 프로그램은 뭘 하는지를 돌려보다가

오전의 주부들을 겨냥한 아침 프로그램에 채널을 고정한다

고물가 시대에 집 반찬으로 절약하는 비법을 다룬 채널에 한참 머물렀다


문득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억지로 집을 나서며

틀어놓은 TV를 계속 앉아서 볼 수 있는 엄마가 너무나 부러웠던 기억

그래서 빨리 엄마가 되어 아이를 보내 놓고 TV를 보고 싶었던 그 마음

그래 오늘은 이렇게 당시 나의 로망을 실현하는 날이다

딸아이가 없었더라면

나는 또 요것 저것 할 일을 찾아 종종 댔을 터이니

나도 함께 늘어질 수 있는 빌미를 딸이 제공해준 것이다

그 마음으로 뒤굴거리며 딸과 함께 하루를 보냈다

약을 먹고 낮잠이 든 아이 곁에서

멍하니 눕기도 했던 날


이런 날은 이렇게 보내면 되는데

참 종종거리며 내가 사는구나


*

빨리 나으라고 아이를 독촉하지 않기로 한다

천천히 앓고

야무지게 나으렴


잡고 움켜쥐고 붙들고 있는 것들은 결국 놓치고 잃고 빠져나간다

다가올 것들이 다가오고 지나갈 것들이 지나가도록 

삶을 좀 놔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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