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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inssoon Dec 31. 2018

출산, 그 밤의 끝을 잡고

마비성 장폐색으로 중환자실까지 실려간 사연.

 우리, 그러니까 나와 남편은 아직도 '그날 밤'에 대해 이야기하길 꺼린다. 예기치 않게 조산을 한 '그날'은 수도 없이 대화에 오르내렸지만 '그날 밤'에 대한 이야기는 출산 후 한동안 꺼내지 않았다. 그날 밤부터 시작된 내 스펙터클한 출산 뒷 이야기는 단언컨대 출산보다 충격적이다. 얼마 전에도 남편과 출산의 추억(?)에 대해 논할 기회가 있었는데 역시나 우리 둘 다 그날 밤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대개 우리는 그날 밤은 건너 띄고 그 다음 날 이야기를 한다.  

 "그 다음 날 중환자실에서 올라온 사람들 중 CPR 코디네이터가 있는 걸 보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지? 당신, 어머니, 장모님 다들 경황없는 것 같길래 나도 모르는 척했지만 그때 진짜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어. 당신 그렇게 저혈압에 빈맥 계속되다가 심정지 오면 그녀가 바로 올라타고 침대 위에서 CPR 하면서 가는 거잖아. 그리고 당신은 병원에서 방송 탔겠지. 코드 블루, 코드 블루..."

 1년 하고도 몇 달이 더 지나니 그는 이제 회상에 농담도 슬쩍 보탤 만큼 여유가 생겼나 보다. 그리고 난 남편과는 쿨하게 나누지 못하는 그날 밤의 이야기를 글로나마 나눌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 이 글에는 다소 힘들고 불편한 상황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위가 약하거나 공감 능력이 너무 뛰어난 분은 '뒤로 가기'를 권합니다!!      


그날 밤


 수술의 마취가 풀리자 본격적인 통증이 시작되었다. 제왕절개 수술 후에 찾아온다는 고통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내 손엔 그럴 때 쓰라고 누군가 쥐어준 진통제 버튼이 들려 있었다. 엉겁결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양가 부모님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다녀가시고 남편과 단둘이 남은 밤이었다. 몽롱한 불면의 상태로 남편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아래쪽에서 축축한 질감이 느껴졌다. 출산 후엔 분비물이나 피가 흐를 수 있어서 속옷을 입지 않고 엉덩이 아래에 방수 패드를 깔아 두는데 느낌상 그런 분비물은 아니었다. 통증으로 몸을 일으킬 엄두도 못 내는 나 대신 남편이 확인해준 바에 의하면 그건... 변비로 고생하던 열흘 동안 그렇게 기다려도 꼼짝 않던 내 몸속 노폐물이었다. 결혼 3년 차 부부지만 아직 서로 앞에서 옷도 갈아입지 않을 만큼 내외하는 우리가, 아무리 하드코어 입원 생활로 어느 정도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하나, 이건 너무 충격적인 전개였다.


 "회복이 빨리 될 건가 보다. 수술하고 방귀가 빨리 나오면 좋은 거잖아." 그는 평소 비위가 매우 약한 사람이지만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뒤처리를 해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한번, 그리고 또다시 한번...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처음엔 당황스러운 마음과 별개로 그도 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이 믿을 수 없는 한밤의 침상 배변이 거듭될수록 불안감이 엄습했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향해가고 병원에서 제공받은 패드도 모두 다 써버렸다. 그때부턴 아예 입원 기간 중 사용했던 휴대용 소변기를 엉덩이에 깔고 누워 있었다. 그렇게 내 의지와 관계없이 몸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들을 받아내길 수 차례... 나는 참을 수 없는 수치심에 몸서리쳤고 자존감은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수술 부위의 통증은 느낄 겨를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멈출까, 의료진은 왜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는 걸까, 옆자리 환자들은 지금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걸 들고 왔다 갔다 할까... 꼼짝 못 하고 누운 채로 나는 점점 패닉에 빠져들었다.


 "환자는 체면을 차리지 않는 거야. 신경 쓰지 마." 내가 미칠 것 같다고 숨죽여 말할 때마다 그는 나를 다독였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비로소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의료진이 내 앞에 나타날 때까지 밤새 묵묵히 내 침대와 오물처리실을 오갔다. 총 20차례였다.(나중에 이야기를 들은 한 친구는 이 대목을 '트루 러브(True Love)'라고 요약했다.) 낮엔 아이를 둘이나 출산하고, 밤엔 장 속 모든 것을 다 쏟아낸 나는 그 시각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침부터 혈압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침대에 누운 채로 실려 내려가 복부 CT 촬영을 하고 돌아오니 산부인과 병동은 나로 인해 이미 어수선했다. 일단 혈압을 올리기 위해 승압제를 투여했고, 간호사와 의사들이 수시로 들어와 내 상태를 확인했다. 그 사이 내 장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비워낼 기세로 다섯 차례나 더 노폐물을 밀어냈다. 잠시 안정을 찾은 듯했던 혈압도 이내 후드득 떨어졌다. 간호사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혈압계를 바꿔가며 내 혈압을 거듭 측정했다. 수축기 혈압이 50 근처까지 떨어지고 맥박이 치솟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얼굴의 간호사 두 명이(그중 한 명이 CPR 코디네이터였다) 병실에 나타났다. "저흰 중환자실에서 왔는데요. 그냥 상태 좀 지켜보려고 왔으니 놀라지 마세요."라고 말은 했지만, 그들의 눈빛은 그냥 지켜본다고 하기엔 너무나 진지했다. 그리고 뒤이어 나타난 중환자실 담당 교수 역시 매의 눈으로 나를 지켜보다 조용히 내게 중환자실행을 권했다. 혈압이 너무 불안정하고 맥박이 빨라서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남편과 친정 아빠를 보디가드처럼 옆에 세우고 나를 실은 침대는 중환자실로 향했다.


어쩌다 중환자실


 어제 출산한 산모에 대한 동정 어린 배려였을까, 내게 주어진 공간은 중환자실 안에서도 독립적으로 분리된 곳이었다. 여러 명의 내과, 외과 교수들이 다녀가고 복부 CT 결과에 대한 해석이 엇갈리는 듯했다. 일단은 장에 가스가 많이 찬 상태고, 장염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침대 위에서 좌우로 몸을 움직여야 가스가 빨리 빠질 거라며 열심히 운동(?)을 하라고도 했다. 수액과 알 수 없는 약물들이 연결된 튜브를 주렁주렁 양팔과 발에 달고(남편과 친정 엄마의 말론 10개는 족히 될 거라 했다) 자꾸만 엉키는 튜브를 풀어가며 나는 침대 난간을 잡고 끙끙 몸을 움직였다(제왕절개 수술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때 옆으로 돌아눕기 위해 얼마나 이를 악물고 애써야 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갈수록 복부 팽만감은 점점 심해졌다. 그러다 다음 날 오후엔 출산 전보다 배가 더 커질 만큼 가스가 심하게 찼고, 난 배가 터질 것 같다고,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소리를 쳤다.


 잠시 후 내 몸엔 두 개의 튜브가 끼워졌다. 하나는 코를 통해 위까지, 다른 하나는 항문을 통해 장까지 연결된 튜브였다. 위아래로 가스를 빼내야 할 만큼 장이 활동을 멈춘 상태, 결론적으로 진단은 마비성 장폐색이었다. 마비성 장폐색은 일시적으로 장의 기능이 멈추는 것으로 복강 수술 후 발생하는 경우가 가장 많은데 제왕절개 수술 후 마비성 장폐색이 나타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했다. 의료진 모두 '본 적 없다'는 반응이었다. 진단과 치료가 늦어지면 천공과 같은 합병증이 생겨 응급수술을 해야 하기도 하고, 장에서 전해질과 수분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빈맥과 저혈압, 탈수 증상이 계속되면 저혈성 쇼크로 사망할 수도 있는 질병이다.(당시엔 검색할 정신도 없이 겪은 일이었으나 나중에 자세히 알고 등골이 서늘했다.)  빈맥, 저혈압, 탈수 모두 내가 겪은 증상이었다.


 누구도 명쾌하게 원인을 설명하지 못했다. 그저 쌍둥이 임신으로 과도하게 커진 자궁에 장이 눌려 제 기능을 잃은 거라고 추측할 뿐. "그대로 아기들을 더 품고 있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르는 거 아니니? 아기들이 오히려 널 살리려고 일찍 나왔나 보다." 친정 엄마는 듣는 내 마음이 무너지는 것도 모르고 아기들을 내 생명의 은인으로 만들기도 하셨다. 그 뒤로도 수차례 외과 의사들이 드나든 걸로 짐작컨대 장이 끝내 제 기능을 회복하지 못하거나 천공이라도 발견되었다면 다시 개복수술... 을 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고 난 중환자실에서 만 하루를 보낸 뒤 양팔, 코, 항문에 온갖 튜브를 단 채로 다시 입원실로 올라갈 수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정신과 비참한 몰골로 다인실 생활은 무리라 판단해 1인실을 선택했다.


 코를 통해 목을 거쳐 위까지 연결된 레빈 튜브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게 불편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목에서 구역질이 올라왔고 튜브가 움직일 때마다 코와 목을 젓가락으로 마구 찌르는 것 같았다. 출산 후 이틀간 불면의 밤을 보낸 탓에 잠이 너무 절실했는데 이 튜브 때문에 제대로 앉지도 눕지도 못했다. "제발 하룻밤만 빼고 자게 해 주세요. 내일 두말없이 다시 끼울게요. 너무 자고 싶어요." 간호사, 의사들을 붙잡고 애원했지만 돌아오는 건 단호한 금지와 경고뿐. 결국 그날도 앉은 채로 밤을 지새웠다. 이대로 며칠 더 지내다간 수면 부족으로 쓰러지겠다 싶을 무렵, 인간의 적응력을 증명하듯 코와 목의 이물감이 줄고 튜브의 존재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난 출산 나흘 만에 처음으로 죽은 듯 잠을 잤다. 내 인생 가장 애처롭고 달콤한 잠이었다.


그렇게 엄마가 되었다   

 

 드디어 만난 아기들은 남편 말대로 정말 작았다. 가뜩이나 작게 태어났는데 며칠 사이 몸무게가 더 빠졌고, 숨을 쉴 때마다 가녀린 등을 들썩거리는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엄마의 파란만장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 리 없는 아이들이 혹시 너무 늦게 왔다고 나를 원망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아이들은 나보다 강한 것 같았다. 매일 그 작은 몸으로 온갖 검사와 처치를 받으면서도 안정적으로 세상에 적응하고 있었다. 코에 튜브를 매단 채로 신생아 중환자실을 오가는 나의 입원 생활은 며칠 더 계속되었다. 그곳에서 난 출산하면서 대학병원을 절반쯤 뒤집어놓은 초유의 인물이자 동정의 아이콘이었다.


 정직한 몸은 며칠 내 출산 사실을 인지하고 젖몸살을 시작했다. 젖이 돌기 시작하니 어찌나 배가 고프던지... 장의 기능이 돌아올 때까지 금식을 해야 했고 혈관으로 모든 영양분이 공급되고 있었지만 그와 상관없이 곡기가 너무 그립고 서러웠다. 하지만 내가 처음 미역국을 먹은 건 그로부터 사흘이 더 지난, 그러니까 출산 후 7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우리의 세 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장이 다시 활동을 시작하고 출산 후 처음 미역국을 먹은 잊지 못할 세 번째 결혼기념일 저녁, 나는 남편에게 잠시 침대 한편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우린 나란히 누워 이야기했다. "함께 산 3년 중 가장 스펙터클한 일주일이었다. 그렇지?", "아마 앞으로도 이런 결혼기념일은 다시없을 거야.(제발)"

상상과 달리 결코 아름답지 않았던 내 초유와의 첫만남. 그리고 출산 7일 후에야 처음 먹은 눈물의 미역국.

 

 다음날 난 20일간의 입원 생활을 마치고 퇴원을 했다. 조기 진통으로 처음 분만실을 찾았던 그 밤에 입었던 차림 그대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병원을 나서는 기분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만감이 교차하는 찰나, 나의 퇴원과 동시에 유머 감각을 되찾았는지 남편의 뜬금없는 농담이 훅 치고 들어왔다. "나... 우리 아기들 퇴원하면 응가는 진짜 잘 치워줄 수 있을 것 같아." 본능적으로 수술부위를 붙잡고 한참을 깔깔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시원하게 터트린 웃음이었다. 문득 병원 문을 나서는 지금의 감정이 다름 아닌 '감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폭풍 같은 스무 날을 보냈고, 그 사이 평생 연인이고 싶던 남편과는 허물없는 가족이 되었고, 두 아이를 병원에 남겨두고 떠나는 서운한 퇴원 길이지만, 그래도 살아있음에, 사랑하는 가족이 있음에, 모두가 무사함에 대한 감사... 바로 그것이었다.




매거진 Becoming mom 연재를 마칩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회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힘들어지는 이야기를 묵묵히 지켜봐 주신 구독자분들도 감사합니다.

새해엔 육아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Becoming mom 보단 밝고 행복한 이야기로 채워보겠습니다.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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