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31주 4일, 너무 일찍 엄마가 되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초음파 검사 결과도 양호했다. 자궁 경부 길이 1.9cm, 다행히 며칠째 더 짧아지지 않고 버티는 중이었다. 몇 mm만 남은 채로 몇 주를 버티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이 상태라면 출산이 가능하다는 34주까지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몇 차례 화장실에 들락거리며 조용히 뱃속 아기들에게 속삭였다. "너희들 나오라고 힘주는 거 아니야~ 오해하지 마." 입원 생활이 열흘 넘게 이어지고 본격적으로 임신 후기에 들어서면서 급작스레 커진 배만큼 낯설고 불편한 것이 바로 변비 증상이었다. 이에 관한 고통스러운 경험담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평생 장 트러블이란 모르고 살아온 내 일이 될 줄이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배는 그 배가 아닌 것 같았다. 아침 식사 후 누군가는 가족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누군가는 이른 낮잠을 청하던 고위험 산모실의 평화를 깨고 나는 신음하기 시작했다. 이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참고 싶어도 자꾸만 끙끙 앓는 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잠시 후 분만실 당직 의사가 들어와 급히 내진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피가 묻은 두 번째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내게 말했다. "1cm 열렸습니다."
하루의 드라마
그날을 드라마에 비유한다면 장르를 뭐라 해야 할까. 공포, 스릴러, 미스터리, 의학, 그리고 약간의 멜로적 요소도 있는 것 같다. 일단 시작은 의학 드라마였다. 내 자궁문이 열리고 있음을 확인한 의사는 바깥의 분만실 스테이션까지 다 들리도록 소리쳤다. "오늘 2-3 뺄 수도 있겠어요."(2-3은 고위험 산모실 내 침대 번호였다.) 피 묻은 손가락을 보고 이미 패닉이 된 나는 "뭘 빼요?"라고 되물을 정신도 없었지만 그녀를 포함한 의료진은 매우 침착하고 일사불란했다. 잠시 후 담당 교수가 (역시 매우 침착한 표정으로) 들어와 응급 제왕절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트렉토실이 소용없다면 대안이 없다고 했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라보파 다시 달고 일주일, 아니 하루라도 더 버티게 해 주세요." 나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담당 교수는 내게 단호하게 안된다고 말한 후 잠시 머뭇거리다 담당 의사를 따로 밖으로 불러냈다. 잠시 후 돌아온 담당 의사는 "라보파를 다시 달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요? 엄마 심장 나가요(의학적 표현은 아니겠으나 듣는 입장에선 매우 이해가 쉬웠다). 라보파라도 다시 달겠다는 말 듣고 교수님이 너무 안타까워서 엄마 마음 준비하도록 도우라 하셨는데, 일단 보호자에게 연락하세요." 다시 내진이 진행되었고, 이번엔 손가락 두 개, 2cm였다.
진행이 빠른 편이라고 했다. 수술이 지체되고 자궁문이 너무 많이 열리면 뱃속 아기들이 위험할 수 있다고도 했다. 의료진은 내게 차분히 마음의 준비를 하라 했지만 정작 그들은 빛의 속도로 수술 준비를 시작했다. 마음의 준비라는 것이 그렇게 빨리 될 리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아는 그들은 전화로 남편에게 수술 동의를 받고, 꽉 찬 수술실 스케줄을 조정해 나를 밀고 들어갈 수술방 하나를 확보하고, 내 수술에 참여할 산부인과, 소아과, 마취과 스태프들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내게 와 수술 부위를 제모하고 소변줄을 꽂았다. 이렇게 갑자기, 마음의 준비는커녕 숨 쉴 틈도 없이 수술실로 밀려 들어가 출산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 줄이야... 그것도 임신 31주 4일에! 너무 당황스럽고 무서웠다. 눈물 한 방울 새어 나올 감정의 틈도 없었다. 수술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숨이 턱까지 차서 뛰어 들어온 남편의 얼굴을 보았다. 스치듯 손 한 번 잡은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나를 실은 침대는 달리기 시작했다.
수술실이 있는 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추워서 떠는 건지 무서워서 떠는 건지 알 수 없는 나와 상관없이 침대는 다시 달렸다. 침대를 둘러싼 무표정의 의료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수술방 문들과 파란 수술복을 입은 사람들... 의학 드라마에서 많이 본 장면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긴 복도를 달려 수술방에 도착하자 대략 열 명의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술대로 옮겨 눕는 건 내가 한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제왕절개 수술 산모들의 경험담을 찾아볼 때 만삭의 몸으로 직접 수술대에 오르는 게 너무 힘들고 서럽다는 이야기를 본 것 같은데, 그런 감정은 느낄 틈도 없었다. 응급 수술이라 수술 전 금식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위험을 안은 채 마취가 시작되었고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마지막 기억은 밝다, 그리고 춥다... 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새까맣던 세상에 희미한 빛이 느껴지고 어수선한 주변 소리도 조금씩 커졌다. 눈을 떠보니 저 멀리 벽시계가 3시 언저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 인생의 가장 급박했던 하루가 절반 넘게 지나갔다. 그리고 난 상상도 못한 날짜에, 마음의 준비도, 의식도 없는 채로 엄마가 되었다(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아기들이 무사히 태어났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침대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문 앞에서 기다리던 남편과 친정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기들은?" 내가 입을 뗌과 동시에 남편이 말했다. "1.7, 1.8kg. 둘 다 숨 잘 쉬어." 그제야 눈물이 흘렀다. 내 눈물은 공포보다 안도에 더 반응한다는 사실을 이때 처음 알았다. 두 아이 모두 마지막으로 잰 몸무게보다 많이 늘었고, 무엇보다 자가호흡을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했다. 아기들은 태어나자마자 엄마품이 아닌 신생아 집중치료실로 보내졌다. 그리고 남편은 내가 회복실에 있는 동안 혼자 두 아이의 입원 수속을 밟아야 했다. 입원 기간 동안 아이들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각종 위험에 대해 무시무시한 설명을 들으며 스무 곳이 넘는 빈칸에 동의 사인을 했다고 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입원실로 옮겨 남편이 찍어온 아기들 사진을 보니 '정말 내가 아이를 낳긴 낳았구나' 차츰 실감이 되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수술을 한 데다 전신 마취로 아무 의식도 없었으니 출산의 감동은 둘째 치고, 내가 아이를 낳았다는 자각이 먼저 필요했다. 사진을 보고 또 보았다. 인큐베이터 안에 누워 있는 아기들의 모습은 정말 까맣고 작았다. 눈에는 안대를 붙이고 코와 입에는 각각 산소와 분유를 공급하는 튜브를 달고 있었다. 심장과 손발에도 주렁주렁 선들이 붙어 있었다. 남편 말로는 아기들이 사진보다 실제로 볼 때 훨씬 더 작다고 했다. 사진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귀로만 듣던 남편의 목소리가 문득 깔끄러웠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의 얼굴에도 폭풍 같았던 하루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평소엔 큰일이 닥칠 때마다 신기할 만큼 냉정한 사람인데, 갑작스레, 그것도 홀로 마주한 두 아기의 인큐베이터 앞에선 냉정도 이성도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저녁 회진 시간이 되자 내 수술을 집도했던 담당 교수가 찾아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조산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엄마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요. 지금까지 잘 버텼고, 아기들도 아주 씩씩해요. 혹시 이랬으면 달라졌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자책하거나 고민하지 말아요." 담담하게 건넨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렇다. 조산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저 피할 수 없는 사고처럼 내게 일어난 일이었다. 신이 선뜻 허락하지 않은 아이를 의학의 힘으로 욕심낸 벌도 아니고, 두 아기를 한 번에 얻은 대가도 아니다. 그간 나도 모르게 상처를 준 누군가의 아픔이 부메랑처럼 내게 돌아온 것도 아니다. 나처럼 조산을 경험한 많은 산모들이 아마 좌절하고 자책했을 것이다. 몇 날 며칠을 눈물로 보내며 몸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산모들을 보며 안타까웠던 마음을 담은 그녀의 나지막한 위로는 두고두고 내게 힘이 되었다.
육아 잡지에서 일하는 동안 내게 출산이란 '아름답고 숭고한 경험'이었다. 일하면서 만난 임신부들은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고, 출산을 회상하는 엄마들에게서 감당 못할 고통이나 좌절을 느낀 적도 없다. 가끔 접하는 힘겨운 출산 스토리도 결말은 언제나 해피 엔딩이었다. 한번은 후배 기자가 출산 현장을 직접 취재하기도 했는데, 그녀에게 전해 들은 생생한 후일담은 출산에 대한 현실감을 높여줬을 뿐 그 자체에 대한 내 정의를 흔들진 못했다. 하지만 몇 년 후 쌍둥이를 임신하곤 출산에 대한 정의가 다소 바뀌었다. 출산은, 특히 쌍둥이 출산은 '위험하고 숨 막히는 경험'이지 결코 아름답진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임신 31주에 갑작스럽게 조산을 한 후, 내게 출산은 '아프고 또 아픈 경험'이 되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주치의의 진심 어린 위로는 분명 큰 위안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날의 아픈 기억이 아름다워지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조산은 내 스펙터클한 출산기의 시작에 불과했다. 남편이 찍어온 아기들 사진을 보며 "내일 당장 일어나 아기들을 보러 갈 거야!"라던 나의 씩씩한 다짐은 며칠이 지나서야 실현되었고, 그 사이 난 중환자실까지 실려 들어갔다. 조산 후에 찾아온 합병증, 시작은 그날 밤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