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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inssoon Dec 17. 2018

돌아온 조산기

퇴원 이틀 만에 다시 대학 병원으로!

 "어어? 다시 배가 뭉치는 것 같은데?" 퇴원 후 집으로 돌아온 지 12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한두 차례 그러다 말겠지.' 남편도 나도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배뭉침은 점점 잦아졌다. '출산 때 쓰려고 미리 받아놓은 진통 앱을 이렇게 일찍 사용할 줄이야...' 자궁 수축을 느낄 때마다 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닐 거야. 이건 그냥 단순한 배뭉침일 거야...' 기도인지 주문인지 알 수 없는 중얼거림으로 현실을 부인하고픈 내 마음과 달리 데이터는 냉정했다. 쌓여가는 진통 기록을 보며 하루를 더 버텼지만 결국 나는 퇴원 이틀 만에 다시 입원 가방을 싸야 했다. 이번엔 대학 병원 행이었다. 혹시 모를 이벤트에 대비해 여성 병원과 대학 병원에서 양다리 진료를 보던 중이었기 때문에 그리 복잡할 건 없었다. 대학 병원 분만실 벨을 누르면서도 '입원까진 필요 없다고 할 수도 있어...'라는 작은 희망을 품었지만 역시 슬픈 예감은 어긋나는 법이 없다. 그날 이후 난 한동안 분만실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퇴원은 없습니다.


 늦은 시간 분만실을 지키던 전공의가 초음파 기구로 내 자궁 경부 길이를 재면서 말했다. "저희는 깔때기처럼 벌어진 부분은 안 잽니다. 의미가 없거든요. 한 번 벌어지면 다시 붙지 않아요." 그 야박하고 엄격한 기준에 의하면 내 자궁 경부 길이는 2센티도 안 되었다. 이어진 자궁 수축 검사에서도 규칙적이고 강한 수축이 눈으로 확인되었고, 당연히 입원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라보파를 다시 맞아야 한다고 했다. 첫 입원에서 라보파 부작용이 심했다고 이야기했지만 이 병원에서 부작용을 직접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트렉토실을 처방할 수 없다고 했다. 이번엔 라보파와 마그네슘을 함께 맞기 시작했다. '다시 그 부작용을 겪어야 한다니...' 멋모르고 맞았던 첫 번째와 달리 이번엔 더 겁이 났다. 그렇게 밤새 불도 꺼지지 않는 분만실에서 난 옆 침대에서 진통 중인 만삭 산모의 고통과 내 몸에 다시 퍼지는 라보파의 고통 중 어떤 게 더 괴로울까 궁금해하며 첫날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몽롱한 상태로 마주한 담당 교수는 "어쩌다 이렇게 진행이 된 겁니까?"로 시작해 "퇴원은 없습니다"로 회진을 마쳤다.


 우습게도 첫날부터 '퇴원은 없다'라는 말을 들으니 되려 마음이 편했다. '내일은 집에 갈 수 있을까?' 따위의 희망은 애초에 싹이 잘렸지만, 그 덕에 희망이 없어지면 현실 적응이 빨라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첫 번째 입원이 맛보기였다면 이번엔 본 게임이었다. 여전히 침대 하나가 전부인 칸막이 생활은 똑같지만 이번엔 화장실도 못 가는 신세였다. 소변은 침대에서 보고 커튼 밖으로 소변기를 내놓으면 수거해서 소변량을 체크하고 버려주는 식이다(옆 침대에 남자 보호자라도 있을 땐 정말 난감했다). 속옷도 가급적 입지 말라고 했다. 응급 상황엔 속옷도 방해가 된다는 게 이유였는데 이건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아 그냥 챙겨 입기로 했다. 아침부터 담당 의사가 초음파 기계를 끌고 커튼 안으로 들어와 자궁 경부 길이를 잰 뒤 자궁 수축 검사를 하고, 심지어 X-ray 촬영도 침대에 누운 채로 진행했다. 밥 먹을 때 잠깐 일어나 앉는 것 빼고는 거의 하루 종일 누워 지낼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밤낮없이 분주한 분만실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분만을 막기 위한 나의 하룻밤이 더 지났다.   

            

 라보파는 두 번째 시도에도 내게 친절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우린 안 맞는데 왜 또 날 찾냐'며 심통을 부리는 듯했다. 손 떨림, 심장 두근거림, 호흡 곤란이 또다시 찾아왔다. 담당 교수도 마그네슘만 다 맞고 라보파를 중단하자고 했다(마그네슘은 혹시 모를 조산에 대비해 아기의 뇌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라보파를 몇 시간 더 맞는 동안 나는 숟가락을 제대로 들지 못해 밥도 못 먹고 친정 엄마가 떠 먹여주는 밥도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 받아 삼키지 못했다. 보다 못한 엄마가 뭔가 마실거리라도 사 오겠다며 자리를 비운 사이, 갑자기 숨이 멈출 것처럼 턱 막히고 심장이 조여왔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침 커튼을 열고 들어오던 엄마와 눈이 마주쳤고 엄마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쳐나가셨다. 마치 의학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3초 만에 의사가 뛰어 들어왔고 급박하게 심전도 검사가 진행되었다. 다행히 큰 이상은 없었지만 라보파는 이렇게 마지막까지 내게 모질고 앙칼지게 굴었다. 그리고 라보파가 지나간 자리엔 다시 트렉토실이 돌아와 지친 나를 달래주었다. 어쩔 도리가 없는 선택이었지만 트렉토실로 평정심을 되찾은 나는 부질없이 또 한 번 계산기를 두드려보았다. 한 사이클이 48시간, 3회까지만 보험 적용, 이미 2회째, 남은 기간은 최소 3주...          

 

낮과 밤의 구분이 모호했던 분만실에서 이틀을 보낸 뒤 하늘이 보이는 창가 자리로 옮긴 건 입원 생활 중 최고의 행운이었다.


고위험 산모실 입성!


 불이 꺼지지 않는 분만실 생활 3일째, 내 양옆 침대에선 대략 6명의 임신부가 각자의 방식으로 진통을 견디다 무사히 출산을 마치고 돌아갔다. 오후가 되자 간호사가 와서 고위험 산모실에 한 자리가 났다며 그곳으로 나를 옮겨줄 거라고 했다. 분만실 안쪽엔 '고위험 산모실'이라 불리는 입원실이 2개 있다. 이곳에는 나처럼 분만실 벨을 눌렀다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녀들'이 누워있다. 대개는 장기입원 환자가 많아 자리가 잘 나지 않는데 3일 만에 운 좋게 내 자리가 난 것이다. 밤낮없이 계속되는 산모들의 진통 소리와 늘 급박한 의료진의 현장음에 다소 지쳐있던 나는 막연히 안쪽으로 들어간다는 것만도 반가웠다. 자리를 옮겨보니 큰 통창으로 하루 종일 햇살이 들어오고 심지어 개인 사물함까지 갖춰진 공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햇살과 공간이 주는 안도감을 그렇게 생생하게 느낀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무심코 체크인했는데 무료 스위트룸 업그레이드에 당첨된 사람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고위험 산모실 2-3번 침대에 짐을 풀었다.


 같은 병실엔 4명의 임신부가 있었다. 31주, 33주, 34주, 모두 주수만 다를 뿐 같은 사정으로 입원한 사람들이었다. 이곳도 역시 커튼을 좀처럼 열지 않고 차분하게 생활하는 분위기였지만 이전에 경험한 여성병원 6인실에 비해선 온기가 있는 편이었다. 서로 인사도 하고, 사정 이야기도 나눌 만큼. 그래도 다들 상황이 상황인지라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결코 아니었다. 자궁 수축을 확인하는 태동 검사와 자궁 경부 길이를 체크하는 질초음파 검사가 매일 아침 반복되었고, 아침마다 새로운 성적표를 받는 아이처럼 '어제만 같기를',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기대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48시간 주기인 트렉토실은 이미 보험 적용이 가능한 3회를 다 채우고 비보험으로 전환되었다. 분만이 가능하다는 34주까지 계속 맞는다면 트렉토실 비용만 1천만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래도 34주까지만 버틸 수 있기를... 트렉토실이 한 사이클씩 늘어갈수록 무사히 시간이 간다는 사실이 감사했고, 간호사들이 심장 소리를 들으려고 기계만 갖다 대면 요리조리 피하는 아기들과의 숨바꼭질마저 어느덧 즐기게 되었다.


 그렇게 나흘이 더 지나 임신 31주가 되었다. 누워서 지내는 생활이 길어지자 팔다리의 근육이 다 풀어져 흐물거리는 기분이었고, 배는 침대에 오르내리기도 버거울 만큼 커졌다. 그래서 "자, 이제부터 한 주 한 주 배가 훅훅 커질 겁니다."라던 담당 교수의 말에 나도 모르게 "지금보다 더 커질 수 있나요? 배가?"라고 되묻기도 했다. 스스로 몸을 일으키지 못해서 침대 리모컨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난감해 어쩔 줄 모르고, 왼쪽으로 누우면 왼쪽에 있는 애가 깔리는 것 같고 오른쪽으로 누우면 오른쪽 아기가 불편해서 요동치는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지새운 낮과 밤, 적당한 샤워시설도 없어 분만실 화장실 문을 잠그고 한 편의 샤워기로 간신히 몸을 씻은 샤워 시간(그마저도 난 의자에 앉아 있고 친정 엄마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겨주셔야 했다), 최대한 일어서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며 침대에 앉아 칫솔질을 하고 남편이 들고 있는 플라스틱 그릇에 입을 헹궈내던 양치 시간(그렇게 적은 물로 양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임신하기 전엔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고 쉬웠던 일상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해진, 나는 고위험 임신부였다.

 

 엄마 뱃속에서 보내는 하루가 인큐베이터에서의 일주일보다 더 좋다? 조기 진통을 겪는 임신부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이다. 나 역시 그 말이 마음에 콱 박혀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밤이 되면 '오늘도 하루 더 내 안에 아기들을 품었구나' 안도했지만, 입원 생활이 너무 힘들 땐 '내가 인간 인큐베이터냐?' 반발이 일기도 했다. 입원과 동시에 태교도 중단되고(남편이 내 배를 쓰다듬으며 태담을 할 때마다 옆 침대에서 다 듣는다고 생각하니!) 여태 철저히 지켜온 식생활도 한순간에 무너진 것 같아 좌절감이 더 컸다(대학 병원에서 받아 든 식사 중 놀라지 않은 것이 없다. 너무 부실하고 맛이 없어서...). 그러다 '엄마 인큐베이터답게 아기들에게 영양 공급이라도 제대로 하자' 싶어 다시 잘 먹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죄 없는 친정 엄마는 어미새처럼 매일 온갖 반찬과 과일을 병원으로 나르셨고, 난 아예 침대 맡에 아이스박스를 가져다 두고 하루 종일 부지런히 먹고 또 먹었다. 먹고, 눕고, 먹고, 눕고... 사실 그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로부터 17개월이 지난 지금, 내 소원은 하루라도 편히 먹고 눕는 것이다. 쌍둥이 육아인에게 하루 세 끼는 사치, 그나마도 앉아서 먹기 어렵고 잠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물론 배가 너무 커서 스스로 앉아 밥도 떠먹기 어렵던 그 시절이 그리운 건 아니다. 다만 돌이켜보니 그 시절을 조금 더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싶긴 하다. 누군가 조산기, 즉 조기 진통으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면 해주고 싶은 이야기다. 가장 바라는 것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 이들이 줄어드는 것이지만, 조기 진통이나 조산은 만혼, 인공 임신과 삼박자를 딱딱 맞추어 나날이 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니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처음부터 퇴원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고 입원 생활을 시작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매일매일 퇴원만 생각하던 첫 번째 입원 생활에 비해 첫날부터 퇴원에 대한 희망을 버린 두 번째 입원 생활은 오히려 마음이 더 편했다. 그러다 상태가 좋아져서 퇴원하게 되면 뜻밖의 선물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매일 검사 결과에 연연하며 스트레스받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마음의 준비와 정보 습득에 좀 더 노력할 것이다. 입원 중에도 난 내내 '난 괜찮을 거야.', '난 이대로 잘 지내다가 35주에 출산할 거야.', '나에겐 아무 일도 안 생길 거야.' 식의 긍정적 생각만 반복했다. 조산을 한다거나 아기들이 이른둥이로 태어난다는 상상을 하면 왠지 부정이라도 탈 것 같았다. 힘든 입원 생활에 긍정적 마인드 컨트롤은 매우 중요하지만 동시에 냉정한 현실 인식도 필요하다. 실제로 난 마냥 긍정적인 자기 주문과 관계없이 조산을 했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또 이른둥이로 태어난 두 아기를 어떻게 돌볼지 상식도 정보도 없어 몇 달을 우왕좌왕했다. 조산에 대처하는 법이나 이른둥이가 필수로 거치게 되는 신생아 집중치료실에 대한 정보,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른둥이 돌보는 법까지 시간이 차고 넘칠 때 미리 좀 공부해둘걸... 후회 막급이었다. 조산기로 입원까지 했다면 충분히 발생 가능한 일인데 말이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좀 더 많은 기록을 남길 것이다. 불과 1년 반이 지났을 뿐인데 극단적인 상황의 변화 때문인지 당시의 기억이 참 빠르게도 흐릿해진다. 인생에 다시없을 경험이고 그 역시 아기를 품고 있는 동안에 일어난 일인데 너무 정신없이 흘려보낸 나머지 사진이나 기록조차 거의 없다. 당황스럽고, 우울하고, 힘들고... 중간중간 긍정의 힘을 불어넣어가며 기운을 냈지만 인간 인큐베이터가 된 것 같은 상황에서 일상을 기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은 아이들이 한 발짝만 떼도 호들갑을 떨며 카메라를 들어대는데 말이다. 돌이켜보면 그때 역시 내 인생의 소중한 순간이 아니었던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처음부터 대학 병원에 입원할 것이다. 그랬다면 그 무시무시한 라보파 부작용을 두 번이나 겪지 않았어도 될 테니 말이다. 비슷한 듯 다른 여성 병원과 대학 병원의 입원 생활을 경험해보니 장단점이 꽤나 분명하다. 대학 병원에 입원했다가 적응이 힘들어 여성 병원으로 전원하는 사람도 있다니 모두가 나 같지는 않겠지만, 내 경우엔 결론적으로 대학 병원에 입원한 것은 잘 한 선택이었다. 여성 병원은 의료진이 친절하고, 상대적으로 음식이 맛있고, 편안하고 안락한 분위기가 장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주요 입원 대상이 출산 산모이기 때문에 입원실이나 서비스는 최대한 편안함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반면 대부분이 1인실 병실이라 입원 기간이 길어질 수 있는 조기 진통 임신부에겐 금전적 부담이 따른다. 다인실을 선택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적어도 내 경험으론 다인실은 1인실에 비해 뭔가 구색 갖추기의 느낌이 강하게 들었고 환경이 너무 열악했다(모든 여성 병원이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대학 병원은 의료진이 언제나 바쁘고, 음식은 놀랄 만큼 맛이 없으며, 분위기는 기계적이고 차갑다. 그렇지만 입원 산모도 나름의 이유로 힘들게 출산한 경우가 많고, 조산기로 입원한 임신부도 많아 심리적 위안이 된다. 조기 진통으로 입원하면 주로 분만실에 머물기 때문에 바깥공기를 쐬거나 방문객을 자유롭게 들일 수 없지만 그만큼 의료진의 밀착 케어가 가능한 것이 장점이다. 내 경우엔 라보파 부작용으로 숨도 쉬기 힘들었을 때 정말 3초 만에 의사가 뛰어 들어왔고, 갑작스럽게 출산이 진행될 때도 의료진이 24시간 근무하는 분만실에 있었기 때문에 대처가 빨랐다. 1인실보다 다인실의 비중이 높고 분만실이나 고위험 산모실 입원도 다인실 수준의 입원 비용이 청구되니 경제적 부담도 적다.


 결정적으로 여성 병원은 출산 산모 중심이라 밤에 보호자가 함께 머무는 것이 가능한데 조산기 입원 임신부에겐 이 점이 불편하기도 하다. 다음 날 출근해야 하는 남편을 내 곁에 붙잡고 싶은 마음과 집에 보내줘야 하는 마음이 매일 다툼을 벌이고, 다인실을 사용할 땐 남의 남편과 너무 가까이서 잠을 자게 되니 말이다. 대학 병원 분만실에선 밤 9시면 면회가 종료되기 때문에 환자를 제외하곤 예외 없이 나가야 한다. 덕분에 나는 남편을 쿨하게 보내줄 수 있었고, 남편은 연애 시절처럼 애틋하게 몇 차례나 돌아와 커튼을 열고 손을 흔들곤 했다. 연애 시절과 달리 이번엔 세 사람에게 흔드는 손이었다. 그는 바랐을 것이다. 다시 커튼을 열면 힘겹게 두 아기를 품은 아내가 변함없이 앉아 손을 흔들어 줄 것이고, 그렇게 더도 말고 3주만 버텨주기를... 하지만 우리의 바람과 달리 '그날'은 너무나  빨리, 그리고 갑자기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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