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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inssoon Mar 05. 2020

조금 불안정해도 괜찮아.

다시 쓰는 너와 나의 애착 이야기-2.

"애착이 뭐라고 생각해?" 남편에게 물었다.

"그거 없으면 애 망가지는 거 아니야?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들은 어릴 때 애착에 문제 있었던 거잖아. 근데 애착이 있으면 자존감도 높고 사회성도 좋다고 들었는데...!"


 그 역시 '애착의 대 유행' 시기에 보고 들은 게 많았나 보다. 그리고 주로 극단적인 내용이 기억에 남은 것 같다. 다소 과격한 표현이 섞여 있지만 일부 맞는 말이긴 하다. 특히 그의 말대로 애착이 '없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애착은 안정적이냐 불안정하냐에 따라 안정 애착, 회피 애착, 저항 애착, 혼란 애착의 4개 유형으로 나뉘며, 약 55~65% 정도의 아이들은 안정 애착 유형에 속한다.


쌍둥이 애착은 어떻게?

 

 '절반도 아니고 2/3 정도가 안정 애착이라는데 내 아이는 당연히 안정 애착이겠지!'라고 기대하는 건 사실 자만이나 과한 착각은 아니다. 특히 육아에 대해 뭐 좀 안다고 생각할 땐 더더욱. (물론 '엄마가 되기 전' 내 얘기다.) 그래서였을까? 나에겐 꿈에서조차 상상해 본 적 없는 '쌍둥이'라는 미션이 주어졌다. 그 말은 곧 내 몸은 하난데 두 아이와 동시에 애착을 형성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와 엄마를 공유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 뱃속에 두 명의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무수한 궁금증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중 쌍둥이의 애착은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애착에 대해 감을 잡기는커녕 출산 준비도 제대로 하기 전에 아이들이 태어났다. 예정일보다 두 달이나 일찍 말이다. 애착 형성에 중요하다는 생애 첫 한 달 동안 아이들은 신생아 집중 치료실에서 지냈다. 나는 하루 두 차례 30분씩 아이들을 만나는 게 전부였고, 그나마도 대부분 자는 모습만 보다가 돌아오기 일쑤였다. 아이들과 캥거루 케어를 시작하고, 인큐베이터를 졸업하고, 차근차근 퇴원 준비를 하면서도 '쌍둥이와의 애착'은 내 머릿속에서 여전히 물음표였다.


 처음부터 내 예상과는 너무 다른 방향을 흘러가고 있었다. 두 아이 모두 안정 애착이 되리란 기대는 애초에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한 예감은 퇴원 후 아이들을 데리고 처음 집에 온 날부터 현실이 되었다. 병원에선 늘 천사처럼 잠만 자던 둘째 아이가 마치 여기가 어디냐는 듯 밤낮없이 울어댔고 그 누구의 손길에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 낯선 냄새... 아이는 온몸으로 불안과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오히려 잘 자고 잘 먹고 누구에게나 잘 안겨 있던 첫째 아이가 나는 더 신기했다.


 산후 도우미가 처음 온 날, 아이의 목욕 시간은 잊을 수가 없다. 둘째 아이는 옷을 벗기려고 제 몸에 손을 대는 순간부터 마치 생명의 위협이라도 당한 듯 온몸이 퍼레질 만큼 울어댔다. 부랴부랴 목욕을 마친 뒤 새 옷을 입힐 때까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대는 통에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라던 도우미는 물론이고 나와 남편도 진땀을 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이는 그 뒤로도 한 동안 스킨십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신생아 집중 치료실을 거친 이른둥이 중에는 '터치'에 과민 반응하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을 정리하면 이러했다.

1. 두 아이와 애착을 형성해야 한다. 심지어 그 둘의 기질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2. 그중 하나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까다롭다. 손만 대도 자지러지는데 애착... 이 될까?

3. 그래서 다른 아이는 아빠 혹은 할머니가 전담한다. 절대적으로 내가 돌보는 시간이 부족한데 애착... 이 될까?


 현실적으로 이런 두 아이와 동시에 안정 애착을 형성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왜 아이를 낳기 전엔 감조차 안 왔는지도 알 것 같았다. 이건, 닥쳐봐야 감이 오는 문제였던 거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내 아이들이 불안정 애착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 그리 힘겹지 않았다는 것이다. 애착 이론을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한 경향이 없진 않지만 말이다.



불안정 애착도 애착이니까.


 대학원 마지막 학기에 들었던 <애착 연구> 수업은 수강생이 많지 않았는데(나중에 알고 보니 어렵다고 소문이 자자한 수업이었다), 교수님과 오붓하게 둘러앉아 애착에 관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이 나는 무척 좋았다. 그리고 그땐 몰랐지만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후 '애착'이 내 현실 육아에 성큼 등장했을 때 참고와 위로가 된 부분도 꽤 많다. 그중 하나가 바로 불안정 애착에 관한 것이다.


 2/3의 아이들이 안정 애착이라면 나머지 1/3은 불안정 애착을 가진 아이들일 텐데, 그 아이들이 모두 잠재적 문제아일까? (사실 난 그렇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문제 행동에 어느 정도 위험 요소가 될 수는 있으나 꼭 불안정 애착이 문제 행동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는 거다. 육아 잡지에서 일하는 동안 애착이 불안정하면 치료, 상담 등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고쳐야 한다고 들어온 나로서는 다소 의아하고 한편으론 반가운 이야기였다.  


 "불안정 애착도 애착의 한 종류예요. 특히 회피 애착이나 저항 애착은 아이가 양육자에게 나름대로 적응하며 찾아낸 대처법 같은 거죠. 양육자에 대한 확신이 없을 뿐 애착은 존재하는 거예요. 정말 걱정되는 경우는 애착 자체가 없는 아이들입니다." 불안정 애착을 인정하고 비교적 너그럽게 바라보는 교수님의 말에 함께 강의를 듣던 이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들도 나처럼 불안정 애착 자체를 큰 문제라 생각했던 거다.


 안정 애착이든 불안정 애착이든 애착은 엄마와 아이의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 상호작용은 단순히 하루 이틀, 또는 몇 달 동안 이뤄지는 게 아니다. 엄마가 자신의 타고난 성격이나 상황과 관계없이 언제든 아이에게 신뢰와 안정을 주는 멋진 존재면 참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생각보다 많다. 원래 성격이 민감하지 못해서, 또는 너무 예민해서, 또는 일하느라 너무 지치고 피곤해서... 마음과 달리 아이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상황 말이다.  


 예를 들어 내 경우엔 종일 내게 안겨 있던 둘째 아이가 잠시 잠들면 첫째 아이를 안으러 갔다. 그런데 갑자기 둘째가 깨서 울면 안고 있던 첫째 아이를 내려놓고 둘째에게 달려가야 했다. 첫째는 할머니나 아빠가 안아줄 수 있지만 둘째는 아무도 달래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수유를 할 때도 내가 아니면 안 되었다. 종종 첫째 아이에게 수유를 하고 싶어서 친정 엄마와 아이를 바꿔 시도해봤지만 둘째는 할머니와 제대로 우유를 먹지 못했다. 그럴 때면 젖병을 물고 있는 첫째를 그대로 할머니에게 건네고 내가 다시 둘째를 안아야 했다.         

  

 첫째 아이 입장에서 보면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엄마는 하루 종일 다른 아이만 안고 있고, 어쩌다 한번 안아주더라도 그 애가 울면 또 자신을 할머니에게 넘기고(?) 뛰어간다. 이런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 아이가 엄마를 온전히 신뢰할 수 있을까. 엄마가 필요한 상황에서 엄마가 다른 아이를 안고 있다면, 이 아이의 선택은 둘 중 하나다. 더 크게 떼를 쓰고 울어서 엄마를 빼앗던지, 아니면 아예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찾던지. 나의 첫째 아이는 두 번째 방법을 택했다.


 둘째가 좀 수월해지기 시작한 돌 무렵까지 그렇게 첫째 아이는 엄마 대신 할머니(또는 아빠)와 먹고 자고 놀았다. 첫째 아이는 나를 별로 찾지 않았고 가끔 안아줄 때도 종종 편히 안기지 못하고 내 품에서 벗어나려 할 때도 많았다. 나보다는 할머니나 아빠와 함께 있을 때 더 편안해 보이기도 했다. 아쉽지만 불안정 애착, 그중에서도 회피 애착의 징후들이었다. 그렇다고 둘째 아이는 안정 애착이었을까. 잠시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 품에서 완벽한 안정을 찾기도 어려웠던 이 아이 역시 불안정 애착, 그중 저항 애착에 가까웠다.


 몸이 하나고 팔도 두 개뿐이라 두 아이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켜주지 못할 때마다 말할 수 없이 아쉽고 애가 탔지만 그건 내 현실이었고,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체력과 마음을 모두 쏟아부어도 역부족이었다. 내가 아이들을 덜 사랑해서도 아니고, 애착을 가볍게 여겨서도 아니다. 그러니 아이들 역시 이러한 현실에 적응하며 나름의 애착을 만들어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안정 애착이 아니면 좀 어떤가. 불안정 애착도 엄연히 애착이라는데.



그래도 괜찮은 진짜 이유


 그나마 다행인 건 남편이 육아에 적극적이고, 양가 어머니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는 점이다. 어쩔 도리가 없는 엄마의 빈틈은 아빠와 두 할머니가 최선을 다해 채워주었다. 존 볼비(John Bowlby)의 애착 이론에 의하면 애착은 엄마와 맺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긴 하나, 다른 양육자와도 충분히 맺을 수 있다. 또한 애착은 꼭 한 명과 맺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여러 명과 형성할 수도 있다(물론 애착의 질이 모두 같은 건 아니다). 주양육자와 애착이 다소 불안정하더라도 다른 양육자와 안정 애착을 형성하면 어느 정도 보완이 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불안정 애착이라도 괜찮다고 쿨하게 말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흔히 알려진 대로 만 3세가 애착의 한계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별히 더 중요한 '민감기(생후 6/9~18/24개월)'가 존재하긴 하나, 그 이후에도 애착은 변할 수 있다. 유아기를 거쳐 청소년기, 성인기까지 대상만 달라질 뿐 인간의 애착 행동은 계속된다. 그래서 때론 양육자에게 부족했던 신뢰를 또래나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하기도 하고, 배우자를 잘 만나거나 또는 자녀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불안정 애착이 안정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안정 애착에 비해 불안정 애착 유형의 사람들이 좋은 배우자를 찾는 능력이 다소 부족할 순 있다.)


 6개월 후에 만 3세가 되는 지금 나의 아이들은, 냉정히 보면 여전히 안정 애착은 아니다. 하지만 우린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다. 하루 종일 세상이 떠나가게 울면서 엄마만 찾아대던 한 아이는 이제 엄마가 외출을 해도 손을 흔들고 뽀뽀도 날려줄 만큼 쿨해졌다. 심지어 내가 집에 없을 때 훨씬 더 잘 논다는 제보도 속속 들린다. 내 품에 편히 안기지 못하고 자꾸만 미끄러져 내 마음을 짠하게 흔들던 또 다른 아이는 아기 때 못한 스킨십을 이제라도 다 하려는 듯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한다고 말하며 내 품으로 파고든다.

 

 한 아이가 안아달라며 내게 달려올 때 다른 아이는 때론 "내가 먼저!" 라며 귀여운 새치기를 하기도 하고, 때론 순서를 기다렸다가 내 품을 차지하기도 한다. 한 아이가 어리광을 부리며 '어부바'를 외칠 때 다른 아이는 조용히 다가와 "난 그럼 엄마 손 주세요!"라고 타협도 한다. 정말 지금 당장 엄마가 필요할 땐 이미 안겨 있는 다른 아이에게 "내려 내려!"라고 소리치기도 하고, 어쩌다 마음이 잘 맞는 날엔 앞뒤로 내게 꼭 붙어 "사랑해요!"를 무한 반복하기도 한다. 이렇게 두 아이와 더불어 우리의 애착도 조금씩 자라는 중이다.


 애착이 3세 이전에 완결되는 것이 아니고, 충분히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내 마음에 적지 않은 여유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좀 더 편하게 인정했고, '지금 좀 불안정해도 괜찮다'라고 스스로 위로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나와의 애착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앞으로 보완할 기회가 있으리라 믿기로 했다. 내가 못해준 걸 세상에 바라는 것이 어쩌면 욕심 같지만, 원래 아이를 키우는 일이 그런 것 아닌가. 엄마가 다 못하면 세상이 채워주는 것. 언젠가 아이들이 마주할 세상의 관계 속에서 진실하고 아름다운 믿음을 경험하기를, 그 덕에 이들의 애착도 좀 더 견고해지기를, 그래서 자신의 아이들에게 더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애착을 물려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다만 쌍둥이는 낳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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