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너와 나의 애착 이야기-1.
육아 잡지에서 5년, 프리랜서 기간까지 합하면 7년 정도 육아 콘텐츠를 제작하면서 느낀 건 육아에도 유행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패션, 뷰티만큼 해마다, 시즌마다 급변하는 건 아니지만(때로는 그래서 육아 콘텐츠가 다소 지루하다고 느낀 적도 있지만) 해마다 유행하는 크고 작은 키워드가 있고, 몇 년 이상 지속되는 것도 있다. 내가 일하던 때는 이른바 '애착의 대 유행' 시기였다.
아이가 태어나 생애 처음으로 형성하는 양육자와의 끈끈한 유대관계, 그런데 이것이 아이의 성격은 물론 사회성, 문제 행동, 나아가 학습 능력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아이가 조금만 이상해도 원인을 애착에서 찾는 전문가도 있었고, 아이가 제대로 된 애착을 갖지 못하면 평생 회복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안정적인 애착 형성을 위해서는 자연분만, 모유 수유(그것도 완모)가 필수, 게다가 생후 3년은 엄마가 끼고 키워야 한다고도 했다.
육아 분야의 유행은 패션, 뷰티 분야의 유행과 달리 심리적 영향력이 매우 강하다. 따라서 흔히 말하는 애착의 3종 세트를 완수하지 못한 엄마들은 불안, 자책감, 분노, 때론 우울감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당시 육아는커녕 결혼도 하기 전이었지만, 애착에 대해 미리부터 조금 겁을 먹었다. '나중에 아이와 애착을 잘 형성하지 못하면 어쩌지?' 막연한 불안도 생겼다.
하지만 몇 년 후 대학원에서 <애착 연구>라는 수업을 만난 후 내 생각은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애착의 실체가 궁금했고, 언젠가 내 아이와의 애착 형성에 도움이 되리란 사심도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애착은 그렇게 부담스럽거나 겁낼 필요 없는, 심지어 무척 매력적인 개념이었다. 그리고 그땐 몰랐지만 어느 것 하나 뜻대로 되지 않았던 임신 출산 과정을 겪고, 역시나 뜻대로 되지 않는 육아를 3년 가까이하는 동안, 그때 부담과 집착을 덜어낸 것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애착은 여전히, 중요하다.
다행히 최근 몇 년 사이 애착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좀 덜해진 분위기다. 몇몇 전문가들이 지적한 대로 애착이 전부는 아니고, 안정적인 애착 형성을 위해 무리하게 애쓸 필요도,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는 의견도 공감을 얻고 있다. 아이가 3세 될 때까지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3세 신화'를 반박하는 연구 결과들도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애착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요지는 과도하게 해석하거나 무리하게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 애착이 아이에게 중요한 생애 초기 경험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양육자와의 애착을 통해 아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신뢰를 경험한다. 그리고 자라면서 그 신뢰와 기대를 타인과 세상에 그대로 적용하고, 또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한다. 즉 양육자와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경험한 아이는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스스로를 괜찮은 존재로 여긴다. 덧붙여 내가 애착을 공부하며 가장 매력적이라 느낀 부분은 애착이 아이를 '적극적인 탐험가'로 키운다는 사실이다.
양육자에 대해 안정적 신뢰를 가진 아이는 새로운 세상을 탐색하고 경험하는 데 두려움이 적다. 즉, 엄마에게 '잘 붙어 있는' 게 아니라 '잘 떨어진다'는 것이다. (애착이라는 표현은 주로 밀착, 친밀감을 대표하는 의미로 쓰이지만, 아이의 애착 유형을 판단할 때 중요한 것은 오히려 분리와 재결합의 순간이다.) 애착의 개인차를 증명하고 처음으로 애착 유형을 정립한 Ainsworth의 '낯선 상황 실험'을 보면 안정 애착 유형의 아이들은 낯선 장소나 낯선 사람의 등장, 심지어 엄마가 낯선 사람과 자기만 남겨두고 잠시 자리를 비워도 크게 연연하지 않고 놀이나 탐색을 잘한다. 그리고 엄마가 다시 돌아오면 환하게 웃으며 반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반면 불안정 애착 유형의 아이들은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왔을 때 엄마를 모른 척하거나(회피 유형), 또는 매달려 울거나 화를 내기도 한다(저항 유형).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생길까? 안정 애착 유형의 아이들은 엄마가 언제든 자신을 지지해주고, 언제든 자신이 원할 때 엄마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그래서 애착 이론에서 양육자는 '안전 기지(secure base)'이자 '안식처(safe haven)로 불린다.
안전 기지로서 엄마는 아이가 세상을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도록 지켜보고 지지해주는 사람이다. 이때 아이는 엄마가 자신과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함께 바라보고 이야기해주길 바란다. 혹시라도 탐색 과정에서 어려움에 부딪히면 아이가 극복할 수 있도록 충분히 도와주어야 하며, 아이가 화가 났을 땐 스스로 진정하는 법을 배우고 연습하도록 기다려 주는 것도 중요하다. 안식처로서 엄마는 편안한 목소리와 표정, 그리고 스킨십으로 아이의 감정을 읽어주어야 한다. 특히 아직 감정 표현에 서툰 어린아이는 자기 스스로도 모르는 감정을 느낄 때 엄마가 충분히 공감해주고 "슬펐어?", "놀랐구나." 식의 적절한 언어로 감정을 네이밍(naming)해주길 바란다.
애착은, 나에게도 중요하다.
어떤 경우에도 나를 있는 그대로 믿어주고, 공감해주고, 기꺼이 모든 도움을 아끼지 않으며, 때론 나보다 더 내 마음을 잘 읽어주는 존재가 나에겐 있던가. 나는 과연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조금의 의심도 없이 신뢰하고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안식처, 이를 믿고 아이가 두려움 없이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애착 이론의 해석은 막연히 '애착이 불안정하면 아이의 성격이 이상해진다', '사회성이 떨어진다', '공부를 못한다' 등의 자극적인 말들보다 훨씬 설득적이었다.
그래서 막상 엄마가 되었을 때도 자연 분만이나 완모, 또는 몇 년 동안 끼고 키우냐 같은 문제는 더 이상 내가 생각하는 애착에 중요하지 않았다. 대신 '어떻게 해야 아이에게 믿음직한 존재가 되나', '얼마나 민감하고 영민한 양육자가 되어야 하나'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이미 다른 글(애by애, 맘by맘)에서도 한 차례 적었듯, 나는 '완벽한 민감성'이란 나에겐 도달 불가능한 영역임을 매우 일찍 깨달았다. 엄마의 민감성이 아이에게 중요한 건 잘 알지만, 아는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도 말이다.
'엄마는 이래야... 저래야 하고, 그러면 아이가 이렇게... 저렇게 된다'는 육아 기사는 참 많이 썼지만 실제 엄마가 되고 보니 그 정답 같은 가이드를 실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던지... 어쨌든 나는 달라도 너무 다른 쌍둥이를 30개월째 키우며 여전히 민감성에 대한 실험과 도전, 그리고 좌절을 반복하는 중이다. 아무리 아이에게 민감하고 싶어도 도무지 몸과 정신이 따라주지 않았던 육아 초보 시절에 비하면 그래도 좀 나아진 것 같지만. (물론 아이들이 내게 적응한 결과일 수도, 아이들이 크면서 의사소통이 쉬워진 덕일 수도 있다.)
육아라는 이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통해 나의 민감성도 조금은 더 높아지지 않을까. 그 덕에 나도 조금은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타인의 감정과 요구를 읽어내는 민감성은 언젠가 다시 사회로 돌아가더라도(돌아갈 수 있긴 할까 모르겠지만) 꽤 쓸모 있는 능력이 될 텐데 말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렇게 멋진 애착이라는 것을 누군가의 인생에 심어주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심지어 내가 그 일에 가장 적임자라는데! 아이에게만 중요한 줄 알았던 애착은, 어느새 내게도 꽤 중요한 것이 되었다.
애착에 대해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 글 <조금 불안정해도 괜찮아.>에서 계속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