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다시 친해질 수 있을까?
"아이 없던 시절은 전생이라고 생각해. 기원전이거나!"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친구가 내게 해 준 말이다. 당시엔 농담으로 웃어넘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말은 이 드라마틱한 인생의 변화를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표현이었다. 그녀의(그리고 나도 이제 동의해 마지않는) 기준에 의하면 나와 남편은 전생에 꽤 사이좋은 커플이었다. 워낙 공통점이 많았던(혹은 많다고 생각했던) 우리는 큰 다툼 한 번 없이 연애하고 결혼하고 신혼 시절을 보냈다. 일찌감치 주도권을 내려놓은 남편 덕에(?) 주도권 다툼이라 할 갈등의 시기도 없었다.
하지만 결혼 3년 만에 쌍둥이 엄마 아빠가 되어 치열한 하루하루를 사는 우리의 현생은 그만큼 달콤하지 않다. 누군가는 당연하다 말하고 누군가는 '이제 전우애로 살라'고 조언하지만, 나는 이 부모 역할 집중의 삶이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다. 아이들은 매일 사랑스러움과 귀여움의 최고치를 경신하고, 엄마로서 내 하루도 분명 행복했지만 늘 뭔가 허전한 기분이었다. 그러다 그 알쏭달쏭한 빈틈의 정체를 발견한 건 의외의 순간, 출산 후 18개월 만에 처음으로 남편과 단둘이 떠난 여행에서였다.
다시 좀 쓰다듬어 봅시다
파란만장한 임신 출산, 그리고 한 달 동안 신생아 집중 치료실을 오간 뒤에야 두 아이를 품에 안은 우리는 한동안 육아 외에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갓 2kg이 넘은 두 이른둥이를 아무 문제없이 키우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아부어야 하는 '동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늘 함께였지만 눈을 맞출 시간은 거의 없었고, 아이들을 보며 함께 웃었지만 서로의 웃는 얼굴을 본 기억은 가물가물했다. 육아 인력의 효율적 운용을 위해 '한 사람이라도 편하게 자자'며 따로 자기 시작했고, 어느새 간단명료하게 용건만 주고받는 대화에 익숙해졌다. 부모로서 우리가 파트너십을 최적화하는 사이, 부부로서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멀어졌다.
우연한 계기로 '저지른' 둘만의 제주 여행에서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우리의 삶을 다시 부부 중심으로 되돌려야 함을 깨달았다. 아이가 없어서 당연히 부부 중심이었던 때와는 또 다른 형태일 것이고, 남다른 노력도 필요할 것 같았다. '하루하루 두 아이 먹이고 챙기는 것만도 바쁜 중에 무슨 노력을 할 수 있을까?', '노력한다고 되긴 하는 걸까? 현실적으로?' 고민했지만 변화는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첫 번째, 그리고 가장 큰 변화는 우리가 다시 함께 자기 시작한 것이다. 밤마다 몇 차례씩 깨어 우는 아이 하나와 한번 잠들면 세상 모르는 아이 하나를 동시에 키우는 우리가 지난 1년 반 동안 시도한 수면의 방식은 꽤 여러 가지지만 우선 생략하고, 가장 최근의 수면 형태는 이러했다. 남편이 아이 둘을 동시에 데리고 들어가 재우고 나오면 나는 그 사이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밤에 두 아이를 혼자 데리고 잤다. 그리고 주말엔 밤 근무를 바꾸어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자고 난 작은 방에서 따로 잠을 잤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우리가 찾은 나름의 생존 전략이었다.
제주 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주말, 나는 혼자만의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남편과 아이들이 자는 방으로 갔다. 그리고 살며시 남편 옆에 누웠다. 신혼 땐 둘이 자도 널찍하기만 했던 침대는 어쩐지 무척 좁게 느껴졌고, 남편의 무한반복 코골이가 낯설 만큼 크게 들렸지만 다음날 아침은 이상하게 기분이 개운했다. 혼자 잘 때와 비할 수 없이 말이다. 그날 이후 우리의 각방 생활은 끝이 났다. (어쩌면 남편은 혼자 만화책도 보고 뒹굴거리다 잠드는 각방 생활을 좀 더 즐기고 싶었을지 모른다. 정말 그렇다고 대답할까 봐 굳이 묻지는 않았지만.)
한밤 중에 갑자기 등장한 나의 존재에 대한 그의 반응은 의외로 자연스러웠다. 그는 습관처럼 따뜻한 손을 뻗어주었고 나는 함께 자던 시절처럼 그의 팔을 (핫팩 삼아)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다시 함께 자다 보니 자연스레 스킨십도 늘었다. 그는 주방일을 하느라 차가워진 내 배를 따뜻한 손으로 데워주기도 하고 팔 베개를 내어주는 인심도 후해졌다. 서로 어깨를 툭 치며 '오늘도 수고!'가 최선이었던 각방 시절에 비하면 적지 않은 변화인 셈이다.
잠들기 전 잠깐의 스킨십은 낮 동안의 스킨십 패턴도 바꿔놓았다. 신기한 건 그런 우리를 보고 아이들도 똑같이 서로를 안아주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이 뒤에서 내 어깨를 안아주면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씩 웃으며 서로에게 다가가 어깨를 안아준다. 남편이 내 손을 잡으면 아이들도 손을 맞잡고 "뽀~"소리를 내며 서로의 손등에 뽀뽀를 한다. 그러면서 꺄륵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너무 좋아서, 그 예쁜 모습이 자꾸만 보고 싶어서 우린 요즘 더 자주 안고 더 많이 쓰다듬게 되었다.
다시 대화 좀 합시다
두 번째 변화는 남편이 늦은 밤 주방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결혼 5년째 요알못(요리를 알지 못하는)인 나와 달리 상당한 요리 내공을 가진 사람이지만 이상하게 여태 아이들 음식 만드는 일엔 거의 나서지 않았다. 그런 그가 제주 여행에서 돌아온 후부터 스리슬쩍 주방에 나타나고 있다. 명절 때마다 어머니를 도와 동그랑땡을 빚던 실력으로 아이들 먹일 쇠고기 밥전을 뚝딱뚝딱 빚기도 하고, 고기 요리의 감칠맛을 높이는 밑간 비법을 조언하거나 재료 손질을 돕기도 한다. 그 덕에 느는 건 내 요리 실력이 아니라(언젠가 늘긴 하는 걸까 궁금하다), 우리의 대화 시간이다.
두런두런 그날 아이들에게 있었던 일들은 물론, 내 일상이나 남편의 회사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요즘 방송마다 왜 그렇게들 먹방을 찍어대는지 이해가 된다. 음식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니 부정적인 말보단 긍정적인 말이 많아지고, 서로의 이야기에 더 귀 기울이고, 예민한 주제도 편하게 꺼내진다. 아이가 생기기 전엔 함께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나누었던 이야기와 감정들이 이젠 아이들을 위한 음식을 함께 만드는 순간에 찾아온 것이다.
36년간 3000쌍 이상의 부부를 연구한 부부치료 전문가 존 가트맨 박사는 함께 대화하고 관심을 나누는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이 모여 행복한 부부, 행복한 가정을 만든다고 말했다. 결혼 1년 차에 아동 가족 대학원 과정을 시작해 <부부상담> 수업을 들을 때만 해도 가트맨 박사가 제안하는 관계의 기술들은 내게 너무도 당연하게 들렸다. '좋은 부부 관계를 위해선 서로 긍정적인 대화를 많이 하고 상대가 말을 할 땐 공감과 경청, 그리고 관심과 열의를 보이는 것... 은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말이다.
하지만 결혼 5년 차, 육아 2년 차의 요즘 나는 부부 사이의 대화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조금은 안다. 공감과 경청, 관심과 열의라는 교과서적인 말들이 실제론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 건지도 말이다. 한 해 한 해 함께 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대화는 줄고, 말 안 해도 좀 알아서 해주길 바라는 마음은 커진다. 하루하루 육아에 피곤하다는 이유로 두서없는 짜증이나 날 선 말들이 뇌도 거치지 않고 입 밖으로 마구 튀어나간다. 무심코 던진 날카로운 말들은 나중에 수습하려고 해도 타이밍이 안 맞거나 또 피곤하다는 이유로 그냥 흘려버리기 일쑤다.
이런 내게 남편과의 한밤 요리 토크는 꽤 좋은 기회가 되었다. 가트맨 박사의 인상적인 주장 중 하나가 '긍정적 감정의 밀물 현상'이라는 것인데, 평소 부부 사이에 긍정적인 감정을 많이 쌓아둬야 부정적인 일이 발생하더라도 긍정적인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와 그것을 덮고 씻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려면 긍정적인 감정을 부정적인 감정보다 최소 5배 이상 쌓아두어야 한다. 긍정적인 감정이 10배쯤은 되리라 자신했던 신혼 시절의 기억은 이제 정말 전생처럼 아득하다. 1:1도 아슬할 것 같은 요즘 우리에게 한밤의 요리 토크가 좀 더 긍정적인 감정을 채우는 계기가 되길, 그리고 그 덕에 아이들 식탁도 풍성해지길 기대하는 요즘이다.
다시 좀 예쁘게 봅시다
세 번째는 내 마음의 변화다. 평소 육아를 부부의 공동 미션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가끔 남편이 아이를 돌보는 일에 관해 크고 작은 실수를 할 때마다 화가 났다. '왜 분유물도 못 맞출까?', '기저귀는 왜 삐뚤게 채우지?', '왜 육아 용품 쇼핑은 항상 나에게만 미루는 걸까?' 나는 '그 쉬운 일도 못하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를 다그치기도 했다. 그런데 우연히 제주 여행에서 다시 읽게 된 <프랑스 아이처럼>을 통해 문득, '아, 이 남자에겐 정말 이 모든 것이 어려울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 여자들은 육아에 관해서 양성 간의 차이를 더 많이 인정하고, 육아에 허술한 남편의 실수를 오히려 사랑스럽게 웃어넘긴다는 대목에서였다.
마침 태교 할 때 자주 읽었던 프랑스 그림책 <아빠랑 있으면 행복해>(상수리)가 떠올랐다. 이 책은 엄마가 없는 저녁 시간에 아빠가 딸아이를 돌보면서 소소한 실수를 연발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빠는 목욕물도 못 맞추고, 수프도 짜게 만들고, 잠자는 방은 환하게 밝혀둔 채 아이를 재우려고 한다. 아이는 이 모든 것에서 완벽한 엄마와 아빠를 비교하며 투덜대지만 결국은 아빠의 귀여운 실수 덕에 더 행복한 저녁 시간을 보낸다. 아빠는 엄마보다 아이를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육아의 기술이 조금 부족할 뿐이라는 것, 작가는 그런 아빠를 따뜻하고 위트 넘치는 시선으로 그려냈다. 이 두 책의 독특한 연상 작용 덕에 나는 남편에 대해 다소 과했던 기대를 조금 내려놓고, 육아에 허술한 남편의 모습도 좀 더 귀엽게 바라보기로 마음먹었다.
남편은 나보다 요리를 잘하지만 운전은 잘 못한다. 나는 남편보다 운전은 잘하지만 요리는 영 자신 없다. 어쩌면 육아도 마찬가지 아닐까. 나와 남편은 잘하는 것이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다. 그럼 나는 내가 잘하는 것을, 그리고 그는 그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지 않을까. 부모가 되기 전 우리가 부부로만 존재했던 시절처럼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예쁘게 바라보고 함께 채울 방법을 찾으면서 말이다.
몇 해 전 내가 일했던 육아 잡지에서 부부관계에 대한 내용을 다룬 적이 있다. 국내 대표 가족 학교인 (주)자람패밀리 이성아 대표가 부모 교육 칼럼 연재를 시작하며 첫 편을 부부관계에 관한 내용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그녀는 '부모로서의 출발점인 부부 관계를 바로 세우는 것이 부모 교육의 시작'이라고 말하며 건강한 부부 관계를 위한 3가지 태도에 대해 조언했다. 간단히 요약하면,
1. 떠넘기지 않기- 내 배우자가 내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당신이 이 정도는 해야지'라고 요구하지 말 것. 내 욕구를 만족시키는 책임은 나에게 있다.
2. 명확하게 말하기-배우자가 남의 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초능력자가 아님을 기억할 것. 아무리 일상을 같이하는 배우자라도 서로의 상황과 그때의 생각, 감정, 행동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막연하게 알아줄 거라 기대하지 말고 자신의 느낌과 바라는 바를 그때그때 부드럽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3. '다름'을 존중하기-상대가 나에게 맞춰 변하길 바라지 말 것. 상대방과 자신의 다른 점을 존중하고 배우자가 정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결혼도 하기 전에 진행했던 칼럼을 오랜만에 꺼내보니 새로웠다. 지금 내 상황과 맞닿은 이야기들이 속속 보여 부끄럽기도 하고. 그 칼럼의 제목은 '우리 모두는 부모이기 전에 부부였다'이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쓸 걸 그랬다. '우리 모두는 부모이기 전에 부부이다.'라고 말이다. 부부는 부모가 되기 전에 거치는 한 단계가 아니라, 알고 보면 부모보다 더 깊은 뿌리, 더 우선해야 하는 관계라는 의미를 담기엔 현재형 문장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부부 관계가 바로 서야 부모 노릇도 제대로 할 수 있고, 아이들도 더 행복하게 자랄 수 있다. 배우자는 (좋든 싫든) 온통 운명으로 둘러싸인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유일하게 내 의지로 선택한 사람, 그리고 나와 함께 또 하나의 운명의 테두리를 만드는 사람이다. 두 아이의 성장을 함께 바라보며 더 행복하기 위해, 나중에 그 아이들이 우리의 둥지를 떠나도 여전히 행복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그를 더 예쁘게 바라보려고 노력 중이다.(그러기 위해 오히려 눈을 질끈 감아야 할 때도 있지만.)
행복한 관계를 위해 '작은 일을 자주 하라(small things often)'는 가트맨 박사의 조언처럼 조금 더 안아주고, 조금 더 대화하고, 조금 더 이해하면서 언젠가 우리 사이에 긍정적 감정이 밀물처럼, 아니 쓰나미처럼 밀려올 날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