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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inssoon Mar 21. 2019

둘일 때가 더 좋았어?

아이가 생긴 후 처음 떠난 둘만의 여행, 이전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날도 채 밝지 않은 새벽과 아침 사이, 우리는 조용하고 민첩하게 집을 빠져나왔다. 앞으로 40시간 동안 아이들을 맡아주실 친정 엄마와 시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현관문을 나선 지 1시간, 설렘과 흥분, 알 수 없는 해방감에 취한 상태로 도착한 곳은 바로 공항이었다. 둘이 함께 떠나는 여행이 당연히 처음은 아닌데 마치 처음 같았다. 임신, 출산, 그리고도 18개월이 더 지나 처음 떠나는 둘만의 여행. 행선지는 마지막 여행지였던 제주, 호텔도 같은 곳으로 정해두었다.


 18개월 된 쌍둥이 아이들을 떼어 두고 떠난 이 용감한 여행의 계기는 남편의 장기근속 휴가였다. 10년 동안 열심히 일한 남편에겐 달콤한 휴식, 파란만장한 임신 출산을 겪은 나에겐 조금 늦은 위로라고 굳이 의미도 붙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날은 공교롭게도 우리가 만난 지 2000일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 딱히 이런 기념일을 챙기는 성격은 아니나 이 민폐 충만한 여행의 당위성을 공고히 하기엔 꽤 유용한 숫자였다. 1000도 아니고 2000이라니!


떠나요 둘이서, 모든 것 훌훌 버리고(?)


 

 제주 공항에 도착하니 슬금슬금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여행을 왔다는 것, 심지어 내일까지 아이들과 떨어져 둘만의 시간을 보낼 것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가야 할까?', '그러기엔 날도 춥고 아이들도 아직 어린데...', '아이들이 엄마 아빠 없다고 밤새 울면 어쩌지?', '두 분 어머니께 너무 큰 부담을 드리는 게 아닐까?'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다 감행한 여행이었다. 그렇게 소심한 우리는 제주에 내려서야 비로소 무수한 걱정을 접어둘 용기가 생겼다. 어쩌나, 이미 바다를 건너왔으니!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말자며 짐도 기내에 가지고 탈 만큼만 간소하게 싸고, 렌터카 대신 리무진 버스를 이용한 덕에 집에서 나온 지 4시간여 만에 호텔에 도착했다. 그곳은 변함없이 친절하고 여유로웠다. 호텔에서 바라본 제주 바다 역시 두 해 전 겨울처럼 푸르고 깊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모든 걸 훌훌 내려놓고 잘 먹고 잘 쉬자'가 전부. 그도 나도 책 한 권씩과 수영복을 챙겨 왔으니 그걸로 충분할 터였다.           


  호텔에서 보낸 시간은 두 해 전 시험관 시술을 앞두고 그곳을 찾았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라운지에 늘어져 책을 읽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산책하고, 따뜻한 야외 풀(무려 어덜트 풀)에서 수영하고 자쿠지에 몸을 담근 후, 느긋한 저녁 식사와 와인을 즐기고, 누군가 정갈하게 세팅해준 침구를 바스락거리며 잠드는 하루. 하지만 그 사이 달라진 건 바로 우리였다. 시험관 시술을 앞둔 두려움, 임준생(임신 준비생) 시절의 스트레스를 훌훌 버리고 온전히 둘만의 휴가를 즐겼던 그때와 달리 지금의 우리는 좀처럼 '훌훌~'이 되지 않았다.

 

 "두 어머니께서 어련히 잘 봐주시겠어?" 떠날 땐 쿨한 척했지만 우리는 결국 쿨하지 못했다. 호텔에 도착해 점심을 먹을 때부터 남편은 아이들 사진을 꺼내 들었고, "언제쯤 애들이랑 데판야끼를 먹을 수 있을까?", "애들이 이런 불쇼(?)를 보면 놀랄까 좋아할까?"... 내내 아이들 얘기만 했다. 이후에도 바나나를 보면 검지 손가락을 치켜들고 "빠! 빠!!", 딸기를 보면 "따! 따!!". 모르는 사람 눈엔 이상해 보였겠지만 우린 수시로 아이들의 말과 행동을 흉내 내며 키득거렸다.


 선배드에 누워 꾸벅꾸벅 졸다가도 지나가는 귀여운 아이를 보면 "우리 집에도 귀여운 애기 있는데...", "둘이나 있는데..."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 동영상을 뒤적거렸다. 하지만 "애들이 엄마 아빠 없어도 너무 잘 지낸다. 한 달만 안 보면 다 잊어버리겠는데?."라고 친정 엄마가 웃으며 전해주신 소식에 우린 할 말을 잃었다. 그토록 우려했던 분리불안은 아이들이 아니라 우리의 몫이었던 셈이다.


낮보다 달콤했던 우리의 밤



 아이들이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는 조금 편안해진 마음으로 와인잔을 들었다. "아니 엄마 아빠가 없는데 그렇게 잘 지낸다는 거야? 심지어 한 번 울지도 않았다고? 다음엔 일본이라도 가야겠는데?" 철없는 부모의 투정으로 시작한 대화는 매일이 전투 같은 요즘 우리의 일상, 어린 시절의 기억, 서로가 바라는 부모와 가족의 모습, 그 안에서 아이들에게 보고 느끼게 해주고 싶은 것들, 그리고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부딪힐 난관에 대한 염려까지... 4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문득 신혼 시절 거실에 마주 앉아 와인 두 병을 비웠던 어느 날 밤이 떠올랐다. 평소 술을 못 마시고, 그래서 거의 안 마시는 내가 처음으로 술이 술술 들어가는 신기한 경험을 한 날이었다. (물론 며칠간 어마어마한 후유증을 겪어야 했지만.) 그날의 기억은 내게 '달콤함'이었다. '누군가와 나누는 대화가 이렇게 달콤할 수 있구나!', '몇 시간을 이어가도 지루하지 않은 대화는 이렇게 달콤한 맛이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4년이 지나, 결혼생활 시즌 2가 시작된 지 1년 반도 더 지난 시점에 그 달콤함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그건 풋풋한 신혼 시절에만 누릴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나?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 내가 그리웠던 건 특급호텔 호캉스가 아니라, 단둘이 살던 시절의 여유가 아니라, 바로 '대화'였구나'. 오늘은 몇 번 애들 응가를 치웠고, 이유식을 먹이는 데 몇십 분이 걸렸고, 밤새 애들이 몇 번이나 깼고, 그래서 나는 피곤하고... (그러니 말 걸지 말라는?) 식의 보고와 형식적인 위로가 아닌 '진짜 대화' 말이다.


 돌이켜보니 아이가 생긴 후 이런 긴 대화는 처음이었다. 남편으로부터 '지금 정말 잘하고 있다'라는 진심 어린 인정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 부모로서 우리 인생의 방향성에 대해 이만큼 구체적으로 공감한 것도 처음이었다. 설레는 로맨스를 기대했던 여행은 이렇게 둘만의 부모 워크숍이 되었고, 방에 돌아가서도 끝나지 않는 수다를 이어가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우리는 18개월 만에 처음으로 달디 단 '통잠'을 잤다.


우린 부모이기 전에 부부



 모처럼 가볍게 일어난 아침부터 난 어제 못다 읽은 책을 집어 들었다. 집에 돌아가면 또 한동안 책을 펼칠 짬이 없을 테니까. 아이들을 두고 떠나온 여행인 만큼 요즘 핫한 소설이나 현실에서 꿈도 못 꾸는 여행책이 더 어울릴 것 같았지만 내가 들고 간 책은 <프랑스 아이처럼>(북하이브)이었다. 몇 년 전 육아잡지에서 일할 때 한참 뜨거웠던 책이었는데 엄마가 된 후 다시 한번 읽고 싶어 식탁에 꺼내 둔 지 벌써 몇 달 째였다.    

 

 이 책의 저자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세 아이 엄마다. 게다가 그중 둘째, 셋째 아이가 쌍둥이다. 결혼도 하지 않은 육아잡지 에디터로서 처음 읽었을 때에 비하면 이번엔 공감의 수준이 완전히 달랐다. 그리고 남편과 둘만 있는 상황 탓인지 모르겠으나 정작 육아 이야기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쌍둥이 부모의 이혼 확률이 높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포함한 부부 관계에 관한 챕터였다. 요지는 프랑스 부모들은 아이를 키우면서도 부부로서의 정체성을 내려놓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모든 것이 바뀐다. 가족의 중심은 부부에서 아이로 옮겨간다. 모든 관심사는 아이의 발달과정에 맞춰지고 다른 건 당분간 접어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다... 우리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이지만 지구 반대편에선 꼭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다. 아니 그들은 그러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문득 몇 년 전 부모 교육 전문가인 이성아 자람 패밀리 대표이사와 진행했던 칼럼이 떠올랐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편 글에서 좀 더 자세히 적어볼 계획이다.)


 육아 잡지에서 일한 5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인터뷰이 중 하나이자 보물 같은 콘텐츠 크리에이터인 그녀는 내가 일했던 잡지에 부모 교육 칼럼을 기고하며 첫 번째 주제로 부부 관계를 선택했다. 자녀를 잘 키우기 위한 양육 기술을 배우는 것보다 부모로서의 출발점인 부부 관계를 바로 세우는 것이 먼저라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이 대표의 말에 무척이나 공감했던 나는 이론적으론 부부가 가족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1.7, 1.8kg으로 태어난 이른둥이 쌍둥이 육아에 몰입한 사이 나도 모르게 '일단 지금은 아이가 먼저', '마음은 있지만 체력이 달려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이가 생긴 후 처음 떠나온 둘만의 여행에 이 책을 들고 온 건 매우 절묘한 우연이었다. 더 늦기 전에 그간 잠시 옮겨두었던 가족의 중심을 다시 부부로 가져와야 함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마침 아이들은 이제 또래와 비교해도 평균치에 준하는 키와 몸무게에 도달했고, 엄마와 아빠의 일거수일투족이 세상에서 제일 궁금한 호기심 대장들이 되었다. 나는 가족과 부부의 중요성을 책으로 배웠지만, 내 아이들은 부모를 통해 배우면 좋겠다. 자신들이 이 가족의 중심이 아니라는 건 어쩌면 그들 입장에선 조금 섭섭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둘일 때가 더 좋았어?"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스스로 물었다. 둘이 있으니 좋았다. 그러나 이제 그러기 위해 굳이 아이들을 떼어 놓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가 가족의 중심이 되면 어디서든, 누구와 함께 있든 항상 '둘일 때'일 테니까. 당분간 둘만의 여행은 다시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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