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만남이 부디 조화롭길!
"쌍둥이는 어때? 정말 똑같아?"
길지 않은 육아 기간 동안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다. 쌍둥이 출산율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지만 현실에서 쌍둥이는 여전히 궁금하고 신기한 존재인가 보다. 혹자는 '쌍둥이가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텔레파시가 통한다', '하나가 아프면 같이 아프다' 같은 속설의 진위를 확인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전~혀 다르지. 그냥 다른 애 둘이 동시에 나왔을 뿐이야."
나의 대답은 항상 같다. 쌍둥이 속설을 확인하려는 이들에겐 '아쉽게도 아직 텔레파시를 주고받는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다'거나, '둘이 서로 바이러스를 옮기니까 같이 아프겠지' 식의 기대에 못 미치는 답을 돌려줄 뿐. 나는 오히려 두 아이가 외모, 성향, 자는 것, 먹는 것, 우는 것... 다 너무 달라서 '어쩌면 이렇게까지 다를까?' 궁금한 적이 더 많았다.
태교 맹신자의 좌절
육아잡지에서 일하는 동안 '계획 임신'과 더불어 나를 사로잡은 매력적인 단어 중 하나는 '태교'다. 일의 특성상 한 달에 수십 명씩 다양한 연령의 아이들을 만나고, 셀러브리티를 인터뷰할 때도 아이와 함께 진행할 때가 많았는데 유난히 순하거나 똑똑하거나 특별히 눈에 띄는 아이들은 대부분 엄마가 태교를 잘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큰 아이를 임신했을 땐 외국어 공부로 태교를 했는데 아이가 외국어에 관심이 많고, 둘째 아이 임신했을 땐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내내 미술 태교를 했는데 아이가 그림을 잘 그려요."라고 말한 아이 모델 엄마도 있었다. 이밖에도 어떤 엄마는 운동을, 어떤 배우는 산책과 명상을, 어떤 아나운서는 꽃꽂이를... 나름의 방식으로 행복하게 태교에 집중했다는 엄마들의 아이는 뭔가 남달랐다.
그래서 나도 열심히 태교를 했다. 쌍둥이 임신으로 이런저런 제약이 많았던 중에 그나마 할 수 있었던 음식 태교와 그림책 태교에 집중했다. 남편에게도 내 7년 경험의 산물인 태교 맹신론을 부지런히 설파했고, 우리는 매일 두 아이의 태명을 부르며 태담을 하고 함께 그림책을 읽었다. 마침 우리 집엔 내가 일할 때 하나 둘 모아놓은 주옥같은 그림책도 책장 가득 쌓여 있었다. 그렇게 조산기로 입원하기 전까지 즐겁게 태교를 했고, 두 아이 모두 내 행복한 기분을 고스란히 느꼈을 거라 믿었다. 덕분에 좀 순한 아이들이 태어나길 기대하면서.
하지만 아이들이 태어나고, 하나부터 열까지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아이의 면면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 부부는 태교 무용론에 뜻을 모은다. 유난히 까다로운 아들 녀석에게 "넌 엄마가 태교 할 때 혹시 귀를 막고 있었니? 다른 생각을 했니?"라고 농담을 던지면서 말이다. (태교의 효과가 다른 면에서 뒤늦게 드러날지 모를 일이지만.) 같은 엄마와 아빠, 그러니까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았고, 같은 태내 환경을 경험했고, 같은 출산의 과정을 거쳐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태어났으나.... 두 아이는 너무나 다르다. 그래서 요즘은 누군가 "둘째 임신했을 때 태교를 잘 못해서 아이가 까다롭고 예민한 것 같아요."라던가, "임신 중 과로로 태교도 못해서 아이가 밤에 잠을 잘 안자요." 등의 고민을 토로하면 "아니 아니, 우리 집은 동시에 똑같이 태교 했는데 둘이 완전 달라요. 그 아이는 원래 그런 거예요. 태교 못했다고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라고 설득력 넘치는 위로를 건넬 수도 있게 되었다.
다르다, 달라!
아이들을 처음 집에 데려온 날, 똑같은 속싸개에 싸여 나란히 누워있는 모습을 봤을 땐 이들이 어느 정도 비슷한 캐릭터일 거라 기대했다. 누구든 막연히 생각하는 대로 '쌍둥이니까!'. 하지만 이들이 그저 성별이 다른 이란성쌍둥이가 아니라, 기질까지 완전히 다른 두 아이라는 것을 깨닫는 덴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하나는 하루에 몇 번씩 토를 했지만 분유를 먹자마자 '꺼~억' 트림을 잘했고, 다른 하나는 분유를 줄 때마다 시원하게 원샷했지만 트림 한 번 하려면 1시간 가까이 안고 등을 두드려 주어야 했다. 하나는 눕혀놓으면 세상모르고 잘 잤지만 다른 하나는 눕히는 동시에 눈을 반짝 뜨고 자지러지는 초예민 등 센서 소유자였다. 하나는 조금만 안아주면 금세 울음을 그치는 순둥이었지만 다른 하나는 안고 흔들고 노래를 불러도 몇 시간씩 대책 없이 울어대는 울보였다. 척 봐도 하나는 순한 기질, 다른 하나는 까다로운 기질을 타고난 아이였다.
18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두 아이의 캐릭터에 드라마틱한 반전은 없다. 한 아이는 여전히 비교적 순한 편이고, 다른 아이는 영아 산통, 수면 트러블, 분유 트러블, 목욕 트러블, 낯가림, 이앓이, 이유식 거부 등 시기별 미션들을 빼놓지 않고 모두 거치며 나의 육아력 상승에 원동력이 되고 있다. 매일 먹고 마시는 건 둘이 똑같은데 신기하게도 싸는 건 냄새도 텍스쳐도 서로 다르다. 하나는 아침마다 손을 흔들며 웃음 가득한 얼굴로 일어나고 다른 하나는 눈도 뜨기 전에 울음으로 먼저 하루를 시작한다. 둘을 나란히 앉혀놓고 한 번에 책을 읽어주는 일타쌍피의 환상을 꿈꿨지만, 현실은 얌전히 앉아 듣는 아이와 책인지 장난감인지 모르고 자꾸만 던져대는 아이 사이에서 이 책 한 줄, 저 책 한 줄 읽다가 뒤죽박죽 되는 일이 다반사다. 처음과 달라진 건 이렇게 다른 두 아이를 보면서 "왜 이렇게 다를까?"가 아니라 "다른 게 당연하지!"라고 생각하게 된 내 마음뿐이다.
애by애, 맘by맘
몇 년 전만 해도 여기저기서 기질이란 단어를 참 많이 썼던 것 같다. 한동안 새로 출간되는 육아서적의 흔한 키워드였고, 육아잡지에서도 기질별 육아법을 조언하는 기사는 꽤 자주 다루는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불과 몇 년이 지났을 뿐인데 기질이란 단어가 다소 올드하게 느껴지는 건 나뿐일까. 여전히 기질에 대한 관심은 높지만 예전만큼 절대적이지 않은 분위기다. 기질은 전문가에 따라 적게는 3~4개, 많게는 8개 정도로 나누는데 실상 그렇게 분류하기에 아이의 기질은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하다. 순한 아이, 까다로운 아이, 느린 아이로 나눠놓고 기질별 조언을 한들 그에 꼭 맞는 아이가 얼마나 될까. 그래서 더 와 닿는 표현이 바로 '애by애'다. 딱히 학술적이거나 고급스럽진 않지만 아이마다 모두 다른 특징과 성향을 지니고 있음을 표현하는데 이보다 적절한 말이 있을까.
대체로 순하지만 건드리는 거 딱 싫어하고 한번 화나면 야생동물처럼 주변 사람을 물려고 덤비는 나의 첫째 아이는 정말 순한 아이일까? 하루 중 18시간 정도는 매우 까다롭지만 어떤 땐 세상 해맑고 순수하며 심지어 가끔은 배려심도 있는 나의 둘째 아이는 정말 까다로운 아이일까? 큰 맥락에선 순한 아이, 까다로운 아이지만 수백 겹의 층으로 완성된 밀푀유처럼 켜켜이 숨겨진 다양한 성향을 가진 각각의 아이일 뿐이다. 틀에 맞춰 아이를 분류하고 그에 따른 조언대로 육아를 한다면, 그게 실제로 된다면 편할 수는 있겠지만 때론 상충되고 때론 엉뚱하고 또 때론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 아이의 복잡다단한 캐릭터를 알아가는 재미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처음엔 아이를 기질을 섣불리 정의 내리고 그에 맞는 육아법을 따르는 것이 그나마 실수를 줄이는 길이라 생각한 초보맘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절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었다.
실제로 기질 연구가들 사이에서도 기질의 유형이나 구성요소에 관해 어느 정도 합의가 이뤄진 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그마저도 완전한 합의라고 보긴 어렵기 때문에 기질 분류는 여전히 애매한 면이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없는 사실은 아이의 기질과 환경과의 상호작용, 즉 부모와의 관계의 중요성이다. 대표적인 기질 연구가인 토마스 Thomas와 체스 Chess(1977)는 '조화의 적합성 goodness-of-fit' 모델을 제시하며 아이의 기질과 부모의 기질이 얼마나 조화를 이루느냐에 따라 아이의 발달이 달라진다고 했다. 그리고 이상적인 아이의 발달을 위해선 부모가 아이를 주의 깊게 관찰해 아이의 신호를 정확하게 알아차리고 해석해 따뜻하고 일관적인 반응을 해주는 민감성이 중요하다고(Howes, 1995) 알려져 있다.(전공 서적은 이 역할을 부모가 '완벽하게' 해야 까다로운 아이의 기질을 완화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다행히 민감성을 타고나긴 했으나 30년 넘도록 내 중심으로만 기능한 이 민감성을 하루아침에 아이에게 돌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심지어 때때로 나를 돌보는 민감성과 아이를 향한 민감성이 충돌하기도 했다. 세상은 나에게 아이를 낳자마자 정신 바짝 차리고 아이를 잘 관찰해서 아이가 원하는 것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심지어 완벽하게 반응해주라고 요구했지만, 난 출산 후 몸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데다 날마다 널뛰는 호르몬 탓에 인생 최고의 감정 기복을 다스리는 것만도 버거웠다. 한 번은 밤새 번갈아 깨는 두 아이를 먹이고 트림시키고 재우기를 반복하다가 새벽 무렵에 쓰러져 잠들었는데 둘 중 하나가 깨서 울길래 "제발 쟤 좀 데리고 나가줘!"라고 남편에게 소리치기도 했다. 나는 나름 예민한 여자였지만 그게 곧 민감한 엄마와 동의어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24시간 아이 둘을 민감하게 돌보기엔 체력이 도무지 따라주지 않았다.
완벽한 엄마는 여기 없다
애by애, 모든 아이가 각각 다르듯, 맘by맘, 모든 엄마도 각각 다르다. 어쩌면 세상 어딘가엔 타고난 민감성으로 아이를 낳자마자 아이의 요구를 완벽하게 읽고 정확하게 반응하는 엄마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엄마라면 까다롭게 태어난 아이를 순둥이로 변화시키는 마법을 부릴 수 있을까. 또 어딘가엔 무던한 성격으로 까다로운 아이를 오히려 더 잘 양육하는 엄마가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자신의 민감성과 아이를 돌보는 민감성이 충돌하진 않을 테니까. 중요한 건 애by애도, 맘by맘도 아니라 그 애와 그 맘의 조화, 쉽게 말하면 궁합일 것이다. 두 아이를 처음 집에 데려와 약 두 달 동안 "정말 왜 이렇게 둘이 달라?"와 "얘는 책대로 되는데 왜 쟤는 안돼?", "아아, 제발 울지 마!"를 하루 백번쯤 읊어대는 대 혼돈의 시기를 보내며 나는 완벽한 민감성이란 없다고, 아니 적어도 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결론 내렸다.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할 수 있는 만큼만 집중하기로 했다. 수많은 육아서적과 블로그를 뒤지며 다른 또래 아이들과 내 아이를 비교하는 대신 내 아이만을 오롯이 집중해 관찰했고, 그 아이가 타고난 고유의 리듬을 가급적 빨리 찾으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가 더 예쁘고 심지어 우는 모습까지 사랑스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두 아이의 기질이 다르지만 내 몸이 둘이 아니고 인격도 둘이 아니니 두 가지 버전의 엄마가 될 수 없음도 미리 인정하기로 했다. 대신 두 아이 모두에게 다름없는 사랑을 충분히 쏟으려 노력했다.
1년 반 전만 해도 밤마다 3시간씩 쉬지 않고 울어대던 아이는 요즘 나와 누워 까륵까륵 웃다가 잠이 든다. 밤마다 우는 아이를 안고 나도 엉엉 울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며 온 동네를 부단히 걸었고, 10분을 채 이어 자지 못하고 자꾸만 놀라 우는 아이를 아예 내 가슴에 올리고 의자에서 쪽잠을 잔 것이 언제였던가... 여전히 까다로운 기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아이지만, 나는 여전히 완벽하지 않은 엄마지만, 이 정도면 그런대로 괜찮은 궁합이라는 생각이 든다. 애by애인 수많은 아이 중에서, 맘by맘인 수많은 엄마 중에서 만난 우리 모두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