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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inssoon Jan 09. 2019

너를 '돌봄'으로 내가 자란다.

내 인생의 발달과업, 돌봄에 대하여.

 "그런 고급 정보를 일하면서(월급 받아가면서) 듣는단 말이야?", "그 유명한 ooo선생님(육아 전문가)이랑 혼자 만나 몇 시간씩 이야기를 한다고?" 막 육아잡지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아이 키우는 친구들은 나를 무척 부러워했다. 실제로 육아잡지의 한 달은 매우 바쁘지만 버릴 것 없이 알차다. 수많은 육아서를 읽고, 내로라하는 육아 전문가들을 만나는 게 일상이다. 특집 기사라도 있는 달엔 육아 부분 베스트셀러 저자를 10명 넘게 만나기도 한다. 아쉬운 점이라면 그때 난 출산은 물론 결혼도 하기 전이었다는 사실. 의외로 육아잡지엔 결혼한, 그리고 아이가 있는 엄마 기자가 많지 않다. 한 편집장은 "일 잘하는 기자는 아이 생기면 다 그만둬요."라고 했는데 난 일 잘하는 기자도 아니었고, 아이가 생겨 그만둔 것도 아니다. 요즘 들어 가끔 '아, 지금 육아지에서 일하면 좋겠다' 생각할 때가 있는데 대개는 아이 키우면서 이해 못할 상황에 부딪힐 때다. '이건 ooo 선생님께 물어보면 해답을 주실 것 같은데...' 생각하며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싶지만 현실은 쌍둥이 육아만으로도 버거워 다시 일할 엄두도 못 낸다.


'돌봄' 미션의 발견!


 어느 분야나 최고로 손꼽히는 전문가들 중엔 오만과 자만이 흘러넘쳐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태생적으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육아'라는 분야의 전문가 중엔 그런 이가 많지 않다(없는 건 아니다). 짧은 만남에도 쓸 거리가 넘치도록 콘텐츠가 풍부하고, 스치기만 해도 주옥같은 인생의 교훈을 전해주던 인터뷰이도 있었다. 아마 당시에 아이가 있었다면 더 많은 걸 배웠겠지만 그렇지 않았어도 지금까지 꽤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깨달음의 순간은 여러 번 있다. 그중 하나가 부모교육 & 양육 전문가 송지희 선생님과의 전화 인터뷰다. 당시 나는 육아잡지에서만 5년, 잡지 기자로 일한 지는 10년 차에 접어든 때였다. 부서 내에서 책임은 날로 커지고, 개인적으론 연애도 결혼도 뜻대로 되지 않아 답답하던 30대 중반이었다. 그런데 그녀와 부모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그러니까 내가 처한 상황과는 별 관련 없는 주제에 대한 아주 객관적인 취재 중에, 갑자기 내 귀에 쏙 들어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돌봄, 그러니까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고 성장시키는 일은 30대의 중요한 발달과업이에요. 엄마가 된 사람은 아이를 돌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직장에서 후배들을 돌보면서 30대의 발달과업을 충실히 수행해야 더 풍성한 장년을 맞을 수 있는 거예요."


"발달.. 과업이요? 누군가를 돌보는 것이요?"


 생후 6개월 무렵엔 기고, 돌 무렵엔 걷고, 두 살 즈음엔 말을 하는 식의 성장 과정이 발달의 전부라 여겼던 당시의 (무지했던) 나는, 신체적 성장과 학업을 마치면 한 인간의 발달이 어지간히 완성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때가 되면 기고, 걷고, 말문을 트는 것처럼, 30대엔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발달과업이라니... 더구나 그 돌봄의 과정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 더욱 성장한다는 말은 문득 신선한 충격이었다. 취업을 한 이후로 난 소모되고, 소모하는 삶에만 익숙했다. 그것이 너무나 당연했고 모두가 그렇게 산다고 생각했다. 성장이나 발달은 접어두고 그저 다 큰 인간으로 하루하루 종종거리며 사는데만 급급했다. 사실 30대, 40대, 50대의 삶도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게 아니라 계속 그 시기에 맞는 과업을 수행하며 '발달'하는 건데 말이다.


 3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부모의 돌봄을 받으며 안온한 삶을 살았던 나는 그렇게 보면 거의 발달 지체 수준이었다. 회사에선 에디터 앞에 '수석'이란 타이틀 하나 달고 후배들이 저지른 사고 뒷수습, 폭탄 제거에 적잖이 나서긴 했지만 그 돌봄도 딱히 잘하진 않았다. 여하튼 그날의 인터뷰는 내가 아닌 누군가를 돌보는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고, 그 덕에 마냥 두렵고 막막했던 결혼, 출산, 육아라는 '총체적 돌봄의 삶'에 대한 부담도 조금은 내려놓게 되었다.


 이후 아동 가족 대학원에 가서 보니 그녀의 말은 에릭슨(Erik Erikson)의 심리사회적 이론에 관한 것이었다. 에릭슨은 인간 발달에 전 생애 접근을 시도한 최초의 인물로, 인간의 심리사회적 발달이 아동기뿐 아니라 전 생애를 통해 계속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각각의 시기마다 인생을 충실히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이다.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이론은 프로이트(Freud)의 심리성적 발달의 5단계 이론을 확장해 8단계로 정립한 이론인데, 한 인간이 자아정체감을 확립하기 위해 일생 동안 8단계의 발달과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다.


 그중 6, 7, 8단계가 성인기 이후의 발달에 관한 것이고, 내게 생각의 전환을 가져다준 '돌봄'에 관한 내용은 그중 7단계, 정확히는 '생산성'에 관한 이야기다. 생산성은 보통 중년기에 맞닥뜨리는 발달과업으로, 다음 세대를 구축하고 이끄는 과정에서 성취하게 된다. 물론 이를 위해 모두가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다. 가장 흔한 것이 출산과 육아 등의 생물학적 생산성이지만, 꼭 아이를 낳아 키우지 않아도 직업적, 또는 문화적으로 나름의 생산성을 추구할 수 있다. 이처럼 어떤 형태로든 다음 세대를 이끌고 돌보면서 충실하게 중년기를 보내야 마지막 8단계의 발달과업(통합감)에 이르고, 궁극적으로 자아정체감을 확립해 인간으로서 발달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돌봄' 미션의 실행!


 6년 전 그 인터뷰의 결론은 이러했다.


 "육아를 위해 일을 포기한 엄마들은 자꾸만 자아를 잃었다고, 존재에 대해 불안감이 든다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지금은 엄마로서, 인간으로서, 30대의 아주 중요한 발달과업을 수행하는 거예요. 더 풍성한 40대, 50대의 인생을 위해서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육아를 위해 일을 그만둔 주위의 친구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한 순간 자존감이 무너진 것 같다고, 답답해 미칠 것 같다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 것 같다고,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없는 내가 너무 부럽다고... 좌절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래서 나도 결혼과 출산이 더 두렵고 부담스러웠는지 모른다. 그 친구들에게 이 말을 들려주고 싶었지만 당시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이도 키워본 적 없는 네가 뭘 아느냐'는 말이 돌아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30대가 끝나기 전에 간신히 돌봄 과업을 시작해 40대까지 앞으로 한참을 더 이어가야 하는 나는 쌍둥이 육아 2년 차 엄마다. 지금까지 한 거라곤 아주 원초적 수준의 돌봄이 전부지만, 이 '돌봄'이라는 미션은 매우 자잘하면서도 방대하고, 또 무척이나 원초적이면서도 복잡다단하다. 태어나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을 평생 해 온 것처럼 처음부터 잘하길 요구당하기도 하고, 언제나 1번이었던 '나'를 대략 100번쯤으로 밀어내야 할 때도 있다. 나는 못 자고 못 먹어도 잘 재우고 잘 먹여야 하는 존재가 (둘이나) 있다. 예쁜 척, 똑똑한 척, 우아한 척하고 살 땐 미처 몰랐던 내 안의 동물 같은 본능을 발견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놀랍고 당황스러운 건 그 모든 걸 연습도 없이 하루아침에 시작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육아(育兒)로 육아(育我). 아이를 키움으로 내가 자란다. 6년 전 인터뷰의 교훈과 에릭슨의 통찰을 믿고 나는 이 어마어마한 돌봄 과업을 과감히 즐겨보기로 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하려고 한다. '5년만 죽었다 생각하고 참으면 좋은 날이 온다'라는 주변의 조언을 귀에 담는 대신 '너를 키우면서 나도 좀 커보자. 우리 같이 잘 자라 보자!' 작심하기로 했다. 육아는 아이를 위해 내 인생을 버리는 것도 아니고, 대가 없는 희생을 강요당하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이 더 나은 내가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육아가 조금은 더 즐겁지 않을까. 자아를 잃는 것이 아니라 더 단단한 자아를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아이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오롯이 만끽하게 될까. 육아의 열매는 아이가 아니라 나에게서 수확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 열매가 더 달콤하지 않을까. 언젠가 돌이켜봤을 때 이 모든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길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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