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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pm May 25. 2023

네가 고생이 많다.

우리 집 가전 이야기 - 4등급 선풍기


내 인생 첫 회사. 그곳은 흔히들 말하는 '남초'였다.

얼마나 유서 깊은 남초인고 하니 서로 통성명을 한 사이가 아니어도, 신입 여사원이 들어오면 소속과 이름, 나이까지 면면이 알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던 곳이었다. 나는 그들을 몰라도 그들은 나를 알았다.


그런 남초회사에 입사한지라 애초에 기숙사 또한 남자 기숙사만 있었다.

대충 봐도 회사 전체 정규직 여사원 비율이 1% 채  것 같은 회사였으니 인프라가 남자 위주로 있는 것도 이해는 간다. 심지어 여자 화장실이 아예 없는 층도 있었을 정도니까.


아무튼 서울에서 출퇴근하던 나와 동기는 입사하고 얼마 안 돼 하루하루 체력이 고갈됨을 느꼈고, 잔 다르크 같은 성격을 가진 내 동기가 여자기숙사 마련을 회사에 강력 어필한 덕분에 감개무량하게도 해당 연구소 최초로 기숙사에 입성한 여성들이 되었다.





기숙사는 낡았지만 깨끗했다. 단 한 가지 문제는 에어컨이 없다는 점이었다.

슬슬 더워지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선풍기를 샀다. 평소 같으면 뭐든 몇 날 며칠을 검색하고 샀을 테지만, 이번 기숙사용 선풍기는 동기가 사는 모델을 색깔만 달리해 똑같이 구입했다. 많이 더운 한여름엔 그냥 집에 가서 자고, 이 선풍기는 이사 나갈 때 다음 사람한테 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무선선풍기의 등장에 2군으로 밀려났던, 하지만 (무선선풍기 목이 부러지는 바람에) 올해  1군의 영광을 되찾은 우리 집 선풍기


그런데 제품을 받아보니 무려 에너지소비 효율 등급이 4등급인 제품이었다. 4등급까지 나오는 제품을 써본 적이 있었던가. 이거 아주 전기 잡아먹는 소도둑이 따로 없겠는걸?


기숙사라 전기세를 따로 내진 않지만 에너지 등급이 낮은 게 신경 쓰였다. 저거 금방 고장 나겠군, 하며 괜한 의심마저 싹텄다. 눈을 세모꼴로 뜨고 한참 째려보기를 며칠, 우려와 달리 4등급 선풍기는 보라색 날개를 팽팽 잘도 돌려가며 우리의 여름을 지켜주었다.





시간이 흘러 잔 다르크 동기는 삼성으로 이직했고, 술을 잘 마시고 머릿결이 좋던 A 연구원, 내가 잘 들어가지 않아 열 밤도 채 같이 자본적 없는 B 연구원이 차례대로 남겨진 자리를 채웠다.


낯가림이 있는지라 새로 온 연구원들이 썩 편하지 않았고, 기숙사에서 지내는 날은 점점 줄었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미안할 정도로 드물게 기숙사를 들르게 됐을 즈음, 아쉽지만 기숙사를 나가기로 결정했다.


마지막으로 기숙사에서 짐을 빼는 날. 혹시나 필요로 하는 물건 있으면 B 연구원에게 줄까 생각했다. 하지만 "B 연구원, 저 오늘 기숙사 나가요. 자주 보진 못 했지만 같이 지내는 동안 고마웠어요." 하는 내 문자에 읽씹으로 답한 그녀에게 굳이 과잉 친절을 베풀진 않았다. (문자 답장은 안 했지만 청첩장 주러는 친히 내려왔던 그녀, 잘 지내고 있을까?)


그렇게 보랏빛 선풍기는 나와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이후 남편과 결혼하게 되면서 마지막 이삿날에도 어쩐 영문인지 엄마의 허락이 떨어져 4등급 선풍기는 신혼집까지 입성하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멀쩡하고 디자인도 예뻤던 커피포트, 테이블 조명 등은 모두 '처분' 딱지가 붙었는데 얘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이만하면 쓸만하다'는 엄마의 한 줄 평과 함께 신혼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는 나의 선풍기. 만 10년을 썼는데도 여전히 고장도 안 나고 잘 돌아가니 과연 엄마의 안목은 뛰어나다.


뜨끈해진 선풍기 머리를 만지작거려 본다.

애쓰고 있구나. 4등급인 네가 고생이 많다.





키 차이가 크게 나는 남편과 산책을 한 바퀴 돌면 남편은 4,000보, 나는 5,000보가 더해진다. 뽈뽈뽈뽈. 열심히도 발을 휘적였구나. 사람도 에너지효율등급이 있었다면 나도 4등급쯤 찍히지 않았을까? 남이 두 걸음 걸을 때 나는 세 걸음을 걸어야 한다. 그래야 겨우 동일선상이다. '내가 세상 살기가 이렇게 남보다 힘이 드는 이유가 다 있다'며 남편에게 너스레를 떨어본다.

등허리에 등급 딱지가 없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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