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려고 산 게 아닌데,
우리 집 가전 이야기 - 공기청정기
"난 나이 들면 엄마, 아빠처럼 안 살 거야."
무슨 불효자식 같은 소린가 싶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는 진심이다.
엄마, 아빠는 일찍이 방구를 튼 지극히 일반적인 부부였다.
아빠는 있는 방구, 없는 방구 죄 쥐어짜듯 뿌왁! 하고 내지르는 방구를 뀌었다. 엄마는 사르르 모래성처럼 흩어지는 수줍은 방구를 뀌었다.
방구도 주인 성격을 닮는 걸까?
아무튼 나는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아빠의 거대한 방구소리를 수시로 들어왔기 때문에
"난 결혼해도 남편이랑 절대 방구 안 틀 거야."라는 다짐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아빠는 콧방귀를 뀌며 (이것도 방구네) "참나, 잘도 그렇게 되는지 함 봐라!" 하셨다.
결혼 6년 차, 용케도 나는 그것을 해내고 있었다.
남편이 남친이었던 시절 2년 반 동안에도, 결혼을 하고 5년이 지난 지금도 공식적으로는 방구를 트지 않았다.
나도 어쩌지 못하는 방구가 "포식..." 혹은 "뽀옹♡"하고 나올 때면, 남편은 가끔은 모르는 체해주고 대부분은 "나 불렀어?"하고 놀린다.
물론 나도 남편에게 똑같이 그런다.
비공식적인 예외 상황을 제외하고, 일단 기본적으로 우리는 방구가 나올 것 같으면 화장실이나 다른 방으로 달려간다.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려도 그것은 제삼세계에서 벌어진 일이므로 모른 체 해주는 것이 국룰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에게 제3안이 생겼다.
거실 한구석에 있는, 그리 멀지 않은 공기청정기 뒤로 가서 방구를 뀌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방구 먹인다"라고 표현한다.
미안해 방구 먹여서...
모름지기 방구라는 놈은 정도를 지키는 중용의 덕으로 유명한데,
무슨 말인고 하니 '냄새나는 방구는 소리가 없고, 시끄러운 방구는 냄새가 없다' 이 말이다.
헛소리를 길게 써서 죄송하다.
아무튼 공기청정기 뒤로 가서 수줍게 방구를 샤르르 뾰로롱 뀌어주면
새파랗던 "냄새" 불빛이 녹색으로, 노란색으로, 주황색으로, 마침내는 빨간색으로 진화하고
이 긴급상황의 해결사, 미스터 모터씨가 우와아앙 소리를 내며 태풍처럼 회전함을 알려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은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빨간색에 가까울수록 뿌듯함이 커지는 것은 물론이다.
[그래, 네가 할 도리를 다하고 있구나.]
남편과 서로의 눈을 마주 보고 말없이 끄덕인다.
[여보, 내가 한 건 했어.]
(끄덕)
오늘도 우리 집 공기청정기는 파랬다, 노랬다, 빨갰다 색색깔의 옷을 입는다.
나도 저이처럼 맡은 바 할 일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이 되어야지.
- 2023년 5월, 어느 소화 안 되는 날에 씀. 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