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삐질삐질 난다. 습한 걸 극도로 싫어하는 나는 여름이 너무 힘들다. 고온다습한 바깥 날씨뿐만 아니라 에어컨 온도를 어중간하게 맞췄을 때의 그 소름 돋게 습하고 서늘한 상태, 뼛속까지 시린 그 느낌이 너무 견디기 힘들다.
습도가 올라갈수록 불쾌지수도 올라간다. 별일 아닌 일에도 쉽게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 이 정도면 공기 중의H2O 입자만큼 화가 머무르는 게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물 입자 하나하나에 스민 화가 어딘가에서는 비가 되어 흘러가져야 하는데, 구천을 떠돌며 이리저리 사람들 사이에 치이고 있어서.
이런저런 생각을 또 하고 있노라면 우리 집 화를 삼켜내 주는 눈앞의 저 제습기가 참 고마울 따름이다.집 안의 쾌적한 공기 속에선 화낼 일이 별로 없다. 그는 가정의 평화를 지킨다. 뽀송한 목덜미는 행복의 척도다.
그는 습도 센서로 나의 눈치를 재빠르게 살피고 습한 공기를 받아들여 조용히 내 화를 빨아들인다.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으로 어린 중생을 보살펴 주는 가전계의 관세음보살이 따로 없다.